KOZUME KENMA X HINATA SYOYO


‌W.  빈 자 네 ( @ b i n j a n a e )

※ 켄마가 다른 등장인물들과 함께 문자를 주고받는 형태의 글입니다. 화살표는 문자 수신인과 발신인을 가리키며, 화살표에 따라
▶: 수신인 (켄마)
◁: 발신인

위와 같이 생각하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통신체는 최대한 기피하였으나 문자라는 형식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일부 사용하였습니다.

‌- 9월 27일 12시 55분


「◁ 있지 켄마! 우리 배구부에 츠키시마라고 알지? 안경 쓰고 키 큰 노란 머리. 오늘이 걔 생일이라 이따 연습시간 때 깜짝파티를 할 예정이야. 좀 재수 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생일이라니까 축하해줘야지!」

「▶ 합숙 때 쿠로랑 같이 블로킹 연습했던 그 녀석인가....... 재미있겠네」

「◁ 분명 깜짝 놀래놓고 하나도 감동 안 받은 것처럼 억지로 정색할 걸? 그럼 옆에서 "울지마 츳키~"하고 놀려줄 거야」

「▶ 쇼요는 츠키시마랑 많이 친한가 보구나」

「◁ 뭐? 말도 안 돼! 켄마가 걔 성격을 몰라서 그래. 아무튼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니고! 켄마는 생일이 언제야?」

「▶ 나? 내 생일은..왜?」

「◁ 왜라니! 당연히 알아야 하니까. 설마 대답 안 해줄 거야?」

「▶ 그럴 리가. 그냥... 한창 바쁠 텐데 내 생일 챙기느라 시간 뺏기면 안 되니까...」

「◁ 안 알려주면 내일까지 연락 안 할 거야」

「▶ 그건 쇼요가 못 버틸 걸?」

「◁ ...너무해!!」

「▶ 10월 16일이야. 며칠 안 남았으니까 특별히 뭘 준비하진 않아도 괜찮아. 축하만 해줘」

「◁ 10월 16일? ..어? 한 달도 안 남았잖아!! 그걸 이제 알려주면 어떡해!!!」

「▶ 그야 쇼요가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보다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

「◁ 신경 안 쓸 리가 없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켄마 생일인데」

「▶ 생일 그렇게 부지런히 챙기지도 않고, 가족이랑 쿠로 말고는 챙겨주는 사람도 거의 없으니까. 생일에 대해선 별 느낌 없어」

「◁ 음... 그런가. 좀 더 즐거운 생일을 보내면 좋을 텐데」


「▶ 쇼요가 축하해주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생일이 될 거야」

「◁ 그그런 낯부끄러운 소리 말고! 갖고 싶은 선물!!」

「▶ 히나타 쇼요」

「◁ ....켄마. 학교에서도 이렇게 능글맞아..?」

「▶ 아니」

「◁ 이제 곧 수업 시작하는데... 얼굴 빨개져서 못 들겠다고.......」

「▶ 미안. 난처하게 만들고 말았네」

「◁ ...이, 이제 수업 시작하니까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

「▶ 응. 이따 연락 줘~」



‌                                                                                                                                    *          *          *



- 10월 02일 22시 07분


「◁ 켄마. 네가 번호 알려줬어?」

「▶ ㅇ」

「◁ 아무리 그 햇병아리 같은 녀석을 좋아해도 그렇지, 남의 개인정보를 마음대로 알려주면 안 되는 거랍니다?」

「▶ ㄱㅊ」
「▶ 쇼요야. 히나타 쇼요」

「◁ 알았어, 햇병아리 말고 히나타 쇼요. 무튼. 히나타한테 왜 알려준 거야?」

「▶ 배구.. 물어볼 게 있다고 하던데」

「◁ 어머나」
「◁ 그러셨어요~? 실은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한 거지? 거짓말하면 바로 티 날 것 같은 녀석이던데. 천하의 켄마가 사랑에 눈이 멀어서 그 정도 눈치도 잃어버리고 만 거야?」

「▶ ..놀리려고 연락한 거면 이만 마칠게」

「◁ 그럴 리가. 그보단...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너 여태까지 자기 생일 신경 쓴 적 없었잖아」

「▶ 그냥... 귀찮으니까」

「◁ 맞아. 귀찮은 건 질색인데. 안타깝게 됐네. 생일날 하루 종일 히나타랑 배구 연습을 해야 할 텐데~」

「▶ ?」

「◁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묻기에 내가 '너랑 배구하는 거란다~'하고 알려줬거든. 그랬더니 네 생일날 도쿄까지 올라온다는 거 있지?」


「◁ 잠깐, 지금 히나타랑 연락하는 거 아니지? 농담이야! 농담!」

「▶ .......」

「◁ 어지간히도 그 꼬마애를 좋아하나 보네」

「▶ 쿠로랑 상관없어」

「◁ 켄마. 얼굴 빨개진 거 여기서도 보이는 것 같다?」

「▶ 아닌데」

「◁ 맞는데?」

「▶ ㄴㄴ」
「◁ ㅇㅇ」

「▶ ㄴ」
「◁ ㅇ」

「▶ ...그래서, 쇼요한테 뭐라고 말했어?」

「◁ 좋아하는 음식은 애플파이, 실용성을 따지자면 게임 타이틀.1 하지만 네가 주는 선물이면 뭐든 좋아할 것이다. 여전히 모르겠다면 주변 친구들에게도 물어봐라. 그랬더니 카게야마인가, 1학년 친구들에게도 물어보겠다 그러더라고」

「▶ 카게야마라면...」

「◁ 분명 카라스노 세터였지?」

「▶ 배구바보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 ...그럴 것 같긴 했어」

「▶ ...」

「◁ 그 뭐냐, 카라스노 1학년 중엔 제법 머리 좋은 녀석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 응. 걱정은 안 해」

「◁ 하긴. 사실 기대돼서 잠도 못 잘 것 같지? 우리 쇼요가 어떤 선물을 줄까 두근두근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받는 생일선물이라니, 얼마나 낭만과 행복이 가득할까! 청춘이다!」

「◁ 켄마?」


「◁ 혹시 삐졌어?」



‌                                                                                                                                    *          *          *



- 10월 11일 00시 12분


「◁ 오늘은 니시노야 선배 생일이었어」

「▶ 오늘?」

「◁ 응! 아니, 벌써 어제인가?」

「▶ 응. 오늘은 11일이야」

「◁ 시간 무지 빠르구나....... 아무튼! 부활동 끝나고 저녁에 아삭아삭군을 배 터지게 먹었다」

「▶ ...그거 아이스크림 아냐?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날 텐데」

「◁ 괜찮아! 내 배는 멀쩡해」

「▶ 쇼요는 정말 건강하구나...」

「◁ 있지, 켄마는 애플파이 좋아하지?」

「▶ 응」
「▶ 혹시 내가 애플파이 좋아한다고 쇼요한테 말했던가?」

「◁ 응? 응! 응, 그러니까, 음, 말했어! 전에. 분명히?」

「▶ 그렇구나. 맞아. 어제만 해도 쿠로랑 같이 애플파이 먹었으니까」

「◁ 안 돼!! 내가 생일날에 선물해준다고 말했는데!」

「▶ 그게 무슨 소리야, 쇼요?」

「▶ 쇼요~? 화장실 갔어?」

「◁ 아아, 밖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잠깐 나가보느라! 아무튼, 애플파이 벌써 먹었다는 거지..?」

「▶ 미안. 농담이었어」

「◁ .......」

「▶ 꼭 애플파이가 아니더라도 쇼요가 주는 선물이라면 뭐든 좋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많은 시간이나 돈을 들일 필요는 없어」

「◁ 켄마... 그럼 나츠가 쓰는 머리핀 줘도 돼?」

「▶ ...머리핀?」

「◁ 켄마가 하면 잘 어울릴 것 같거든! 나츠랑 다른 느낌으로 귀엽지 않을까~?」

「◁ 이번엔 켄마가 화장실 간 거야..?」

「▶ ...상상했어. 별로 안 어울릴 것 같아」

「◁ 아니야. 무지 귀여울 거야」

「▶ 그럼 쇼요도 같이 머리핀 해볼래?」

「◁ 그럴까!? 좋아!!」

「▶ ...이게 아닌데」

「◁ 다음에 만날 때까지 머리 예쁘게 가꿔놓고 있어야 해, 알았지~? 오빠의 실력을 보여줄 테니까」

「▶ 쇼요... 나이로 치자면 내가 형인데...」

「◁ 아니아니아니, 나츠 오빠란 얘기야! 켄마한테 오빠가 아니라고!!」

「▶ 알고 있어」

「◁ 또 일부러 놀렸지!! 너무해!」

「▶ 그치만 쇼요가 귀여운 걸」

「◁ 복수할 거야... 반드시 켄마를 귀엽게 만들어주고 말겠어..!」

「▶ 기대하고 있을게」

「◁ 흥!」



‌                                                                                                                                    *          *          *



- 10월 16일 13시 11분


「◁ [○○택배] 주문하신 상품 16-18시에 도착 예정입니다. 특이사항 있을 경우 문자나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                                                                                                                                    *          *          *



-10월 16일 21시 08분


「◁ 켄마! 혹시 택배 도착했어?」

「▶ 응. 잘 받았어」

「◁ 다행이다!」

「▶ 당연히 애플파이가 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 사실.. 다른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어! 쿠로오 씨라든가, 다이치 선배도 이것저것 알려줬고. 카게야마한테도 물어보긴 했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됐어. 걘 배구 밖에 모른다니깐?」

「▶ 그건 쇼요도 비슷한 것 같은데...」

「◁ 내가 적어도! 카게야마보단! 나아! 무조건!」

「▶ 풉. 그래 알았어」

「◁ 웃었어!?」

「▶ 그치만 귀엽잖아」

「◁ 아아아아아무튼 선물에 대한 감상은!@!!」

「▶ 음... 옷 선물은 처음 받아봐서 신기하기도 하고.. 마음에 들어」

「◁ 예!! 성공했다!」

「▶ 응. 근데 바보쨩이라니... 쇼요 이 캐릭터 좋아하나 보네」

「◁ 배구 마스코트니까! 실은 나 이미 같은 옷을 갖고 있거든」

「▶ 아」

「◁ 그러니까.. 한 마디로 커플 티셔츠!」

「▶ 그렇구나」

「◁ 왜? 별로야?」

「▶ 아니, 오히려... 별로라기 보단... 오히려 너무 좋아서 지금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말 고마워 쇼요. 아주 기뻐」

「◁ 휴우, 다행이다. 혹시 싫어하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 근데 쇼요.......」

「◁ 응?」

「▶ 조금 커」

「◁ ?!?!???!?」

「▶ 괜찮아. 입고 다닐 순 있어」

「◁ 예에에에!!」

「▶ 다음에 만날 때, 꼭 이 옷 입고 갈게」

「▶ 아 참, 그리고」

「◁ 응?」

「▶ 사랑해」

「◁ 나도 사랑해, 켄마!」







W.  치 즈 쨈 ( @ c h e e z j j a m )

‌O 2 O



“푸훕- ㅁ뭐라고?”


  야치가 마시던 프라푸치노를 내뱉으며 소리쳤다. 가게 안의 사람들이 힐끔 힐끔 그런 야치를 쳐다봤다.


  “야,야치.. 일단 진정하고…”
  “아니, 히나타!! 어어어어떻게 진정해애!! 그그그그러다가 인신매ㅁ…!!”


  히나타가 다급히 야치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야치를 향해 한 쪽 손 검지를 들고 입에 갖다대는 동작을 해보였다.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미 물은 엎질러졌는걸, 얼굴을 양팔에 파묻고 엎드린 히나타를 바라보던 야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그.. 마,많이 이야기.. 해봤어?”


  그 질문에 고개를 슬쩍 돌려 야치를 바라보던 히나타가 잠시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흐응… 응… 많이… 했지.”
  “…...괜찮은거, 맞는거지?”


  저가 더 불안한지 야치가 재차 확인하자 히나타가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렇겠지? 설마 살인자거나 그렇진 않을거야!”
  “히익!!!!!! 사,사사살인자..!!!”


  …!아차, 순간 인상을 쓴 히나타가 다시 손을 뻗어 야치를 달랬다. 야치를 달래면서 히나타는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로,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게 없을지도. 우리가 아는 건 컴퓨터를 통해 보여지는 만들어진 모습, 아닐까. 아무리 내가 나를 다 내보였다고 해도말이야. 야치를 보내고 다시 카운터에 와서 멍하게 생각에 잠겨있던 히나타가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딸랑- 하는 소리가 가게를 울리자 히나타가 포스기 앞에 가 자리를 잡았다.


  “…따뜻한 바닐라라떼…”
 


  주문을 받은 히나타가 계산을 마치고 커피머신을 만졌다. 일에 집중하려해도 문득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골이 지끈거렸다. 완성된 음료를 픽업대에 올리면서 히나타가 진동벨을 울렸다.


  “맛있게 드세요.”


  영업용 미소로 진동벨을 회수하던 히나타가 문득 다시 고개를 돌려 손님을 바라보았다. 자주 오는 손님인데 주문할 때를 제외하고는 전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딘가 조금 어두운듯, 조용한 사람이라 붙임성 좋기로 소문난 히나타도 굳이 말을 걸어본적 없는 손님. 다음에는 말 걸어봐야지, 하고 생각하던 히나타가 지잉- 하고 울리는 휴대폰을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해?]


  딱히 숨기려고 한건 아니었지만, 제일 친한 친구인 야치한테도 진작 말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바로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과의 관계였다. 한창 가계일이며 사람들과의 관계며 치이던때, 히나타가 우연히 찾은것은 바로 온라인 커뮤니티였다. 평소에 컴퓨터와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던 히나타가 어찌어찌 잘 찾은것은 용했지만, 그 커뮤니티의 분위기라던가 용어라던가, 전혀 모르는 상태였던 탓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그곳에서 조차 겉돌게 되었다. 그때 히나타가 올린 글에 유일하게 관심을 가져준 사람.


  [일하고 있어. 넌?]



  얼굴도 모르고 나이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히나타는 왠지 그 사람이 좋았다. 자기 말에 진심으로 귀기울여준다는 느낌을 받았기때문일까, 어쨌든 힘든 시기였던 히나타는 급속도로 마음을 열었고 상대방도 그런 히나타에게 마음을 연듯 보였다. 결국 두 사람은 휴대폰 번호까지 교환하게 되었다.

  매일 일 마치는 시간만 기다리던 히나타는 이제 장소에 상관없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이 점점 나아지자 고민외에 다른 이야기들로 시간을 보내게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것이다.


  [보고싶어.]



  으아아아아아아아, 이래도 괜찮은걸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때림과 동시에 [나도 너무 보고싶어.]라고 답장을 치고있는 히나타.


  [이제 곧 보니까.]


  순간 날라온 답장에 히나타가 그자리에 멈칫하고 멈췄다.
  바로 이게 최근의 고민이었다. 실제로 ‘만난다’는것. 처음에는 설레기만 했던 이 말이, 이제는 점점 걱정으로 바뀌고있었다. 아무리 봐도 얘는 하나도 안떨리는것 같단말이야, 히나타가 또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정말 보고싶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없이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것은 좋았지만 겨우 손바닥 크기만한 휴대폰에 갇혀있는 느낌이었달까.


  [응. 빨리 만나고싶다.]


  어차피 부딪힐거라면, 그냥 시원시원하게 부딪혀버리자, 하고 히나타는 생각했다. 답장을 보낸 후 카운터에 상체를 기대고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여기 저기 앉아서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무언가 일에 집중한 사람들, 여유롭게 차를 즐기는 사람들, 영화나 책을 보는 사람들. 문득 히나타는 아직 만나지 못한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괜히 멋대로 상상하지 말자고 다짐했었지만.


  “…그래도 역시 궁금한걸.”


  밤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말투… 분위기도. 가게 안을 이리저리 오가던 히나타의 눈동자가 한 곳에 멈췄다.

  구석에서 혼자 책을 읽는 한 남자였다. 저런 느낌이려나, 히나타가 생각했다.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이 어쩐지 부스스하게 흩어져있었다. 반쯤 감긴 녹색 눈동자는 책에 꽂혀 움직이지 않았다. 책장을 넘기던 남자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네… 아니요… 아직… 오늘은 야간인데요… 응급실이요…?…하아…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조용한 음악탓에 통화내용을 대충 들은 히나타가 의산가, 하고 생각할때였다. 문이 익숙한 음으로 딸랑- 소리를 냈다. 그리고 방금 나갔던 조용한 남자가 다급한 모습으로 가게 안에 들어섰다. 가게 안을 둘러보던 그가 검은 머리 남자를 발견하고는 빠른걸음으로 그쪽을 향했다.


  “…아카아시.”
  “…아, 코즈메.”
  “…빨리, 서둘러.”
 


  코즈메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들고있던 가운을 아카아시에게 던졌다.


  “네-네, 코즈메선생님.”


  티격대며 문을 나서는 두 사람을 보던 히나타가 흐응, 저 사람도 의사였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




  만남의 날이 다가왔다. 히나타는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한채 가게에 도착했다. 문 앞에서 몇 분동안을 열쇠와 씨름하다가 겨우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팔을 뻗어 문을 잡고는 같이 들어선다.


  “…아.”
  “…평소보다…일찍 오셨네요…”
  “…! 아. 네…”


  …의사, 히나타가 떠올리며 생각했다. 낮은 톤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귀에 다가와 속삭이는듯 했다. 그러고보니 계속 말을 못붙여서 다음에는 꼭 말 걸어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아…”


  뭔가 말을 붙이려던 히나타가 결국에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기계를 켜며 스스로가 한심하다는듯 고개를 저었다. 기계가 켜지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휴대폰을 켜자 [잘 잤어?] 라는 메세지가 저를 반긴다.


  [응. 넌?]


  밤새 잠을 한 숨도 못잤건만, 선의의 거짓말을 보내며 히나타는 그러고보니 서로 이름도 아직 모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서로 프로필에 떠있는 H와 K. 또는 ‘너’라는 말로 호칭을 대신해왔던 것이다.


  [응, 나도. 드디어 오늘이네.]


  방금까지도 생각하던 일이었는데, 이렇게 들으니 다시 한 번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오늘이네.’ 얼굴이 화끈거리는 찰나, 코즈메가 카운터로 다가섰다. 가까이 마주한 코즈메 역시 일때문인지 낯빛이 피곤으로 물들어있었다.


  “바닐라라떼… 따뜻한걸로…”
  “아, 네!”



  휴대폰을 집어넣고 머신으로 이동하던 히나타가 코즈메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많이 피곤해보이시는데, 샷 추가해드릴까요?”
  “…에… 응… 고마워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한 코즈메가 카운터에 놓인 타블렛pc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멤버십… 같은건가요…?”
  “…? …아, 네. 맞아요.”
  “…혜택이… 꽤…많네요…”
  “네네, 그거 꽤 신기해요. 등록하고 휴대폰에 어플받으면 개인 취향같은거 분석해서 추천음료나 가끔 쿠폰같은거 알아서 보내주고 그러더라구요.”


  히나타의 말에 코즈메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투오네요.”
  “…네?”
  “O2O…음.. 온라인이랑 오프라인이 연결된…그런거에요… 아… 신경쓰지 마세요…혼잣말이에요…”


  …O2O…오투오…. 온라인…오프라인…, 머릿속으로 곱씹던 히나타가 만들어진 음료를 내밀었다.


  “단거, 좋아하시는것 같던데 식사 안하셨으면 간단하게 애플파이라도 드실래요?”


  히나타의 말에 코즈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좋아해요… 애플파이…”
  “..프흐, 잘됐네요. 마침 신 메뉴로 가져온건데. 며칠전에 아는 사람이 적극 추천해서요.”


  히나타가 애플파이를 데우며 웃었다. 며칠전 그와 대화하다가 애플파이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준비한 메뉴였다. 신기하네, 히나타가 애플파이를 꺼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스쿱 떠 얹어 내밀었다. 코즈메가 한 번 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조심스레 접시를 받아들었다. 미묘하게 올라간 코즈메의 입꼬리에 히나타가 뿌듯한듯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았다.


  포크로 한 번 푸욱 찔러 입에 가져간 코즈메가 두눈을 감고 천천히 입을 오물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히나타가 가만히 어제본 검은머리의 남자를 떠올렸다. 아니야… 뭔가…,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생각하는 히나타를 힐끔 본 코즈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포크를 내밀었다.


  “…안드세요…?”
  “아. 전 따로 있어요. 다 드세요. 맛있게 드시니까 기분이 좋네요.”
  “…아…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달달한게 필요했는데…”
  “아, 그래요?”
  “…네… 중요한 날이라… 근데 야근을 해버려서…”


  다시 한 번 포크로 무자비하게 애플파이를 쑤시던 코즈메가 아이크스림을 퍼서 입에 집어 넣었다.


  “중요한 날이라… 뭔진 모르겠지만 잘 하실거에요.”
  “…아. 네… 고마워요…”
  “저도 그렇거든요.”
  “…에.”


  시계를 본 히나타가 몸을 돌려 가게 조명을 켜고 아이팟을 재생했다. 가게에 조용한 음악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네, 오늘 누구를 만나기로 했거든요.”
  “아… 여자친구…?”
  “흠… 그런건 아니지만… 뭐랄까… 음…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달까…”
  “…가게… 들릴때마다… 늘… 밝아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음..아마 잘 될거에요…”
  “아, 고마워요. 히나타 쇼요에요.”
  “…코즈메…”
 


  코즈메의 뒷 말을 기다리던 히나타가 고개를 옆으로 갸웃하며 물었다.


  “코즈메..?”
  “…켄마…”
  “켄마상! 프흐, 잘 부탁해요. 저희 단골이시잖아요. 저도 알고있어요.”


  그런 히나타를 빤히 보던 코즈메가 고개를 까딱하고는 한 손으로는 애플파이를,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만지기 시작했다. 베시시 웃던 히나타가 가게 문에 걸린 팻말을 [OPEN]으로 돌렸다. 코즈메 뒤를 지나치며 카운터에 놓인 타블렛을 본 히나타가 말했다.


  “아까 말씀하신 오투오..? 말이에요,”
  “…네.”
  “그거- 좋은거겠죠?”
  “…네?”
  “그러니까…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그 경계가 허물어진다는게… 꼭 좋지만은 않을수도 있지만.. 그래도…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된거니까… 음… 좋은 현상….이지 않을까..해서요.”
  “….아….뭐….”


  코즈메가 웅얼거렸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히나타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네?”


  당황한 코즈메가 몸을 뒤로 빼며 대답했다.


  “사람도 오투오- 하잖아요.”
  “….에… 그런가요.”
  “네! 사실, 오늘 만나는 사람,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이거든요. 처음에는 막 고민상담하고 그러다가… 음… 어쩌다보니 친해져서… 그래서 오늘 처음 만나는 건데… 음, 이것도 오투오-“


  혼자 곰곰히 생각하며 말하던 히나타가 갑자기 조용해진 코즈메를 보고는 아차, 싶어 뒷 머리를 긁적였다.


  “아. 역시 좀 위험하다거나- 이상하다거나 그렇게 보일까요..? 불편하셨으면 죄ㅅ…”
  “…아뇨…”


  코즈메가 손에들린 휴대폰 버튼을 눌렀다. 히나타의 앞치마 안에서 작은 진동이 들려왔다.


  “…?”


  천천히 꺼낸 휴대폰 화면에는 [쇼요?] 라는 두 글자가 떠있었다. 히나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앞의 코즈메를 바라보았다.


  “쇼요.”
  “….!….히익?”
 


  놀라 당황하는 히나타를 바라보던 코즈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맛있어, 애플파이…”
  “…ㅋ,켄마…?….ㅋ..케이..?”
  “…서로 들켰네… 거짓말… 잘 못잤어…나…”
  “…!…ㄴ..나도…”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는다는듯 히나타가 두 눈을 꿈뻑이며 어버버거렸다.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코즈메가 짐을 챙겨 일어섰다.


  “저기서, 기다릴게… 마치는거…”


  창가자리에 자리잡은 코즈메가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뭔가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중얼거렸다.


  “…쇼요,”
  “…으,응…네..?”
  “…프흐… 응, 쇼요 말… 맞을지도…”
  “?…뭐가?”



  소파에 자리잡고 앉으며 가방에서 작은 게임기를 꺼낸 코즈메가 다시 한 번 웃었다.


  “오투오- 좋은 거 맞아…응.”


  너랑 만나게 됐으니까, 중얼거리고는 다시 게임기로 시선을 옮기는 코즈메였다. 딸랑거리며 문이 열리고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멀뚱멀뚱 코즈메를 바라보던 히나타가 그제서야 후다닥 뛰어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식어버린 바닐라라떼를 마시는 코즈메도, 허둥지둥 주문을 받는 히나타도 약간은 상기된 얼굴, 그리고 가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어딘가 닮은, 그런 날이었다.







W.  커 스 ( @ C U S _ 3 3 3 )






“히나타 보게 뭐하는 거야!”


결국 또 카게야마의 토스를 놓치고 말았다. 카게야마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이 나에게 다가 오고 있었고 스가 선배가 그런 카게야마를 말리고 있었다.


“히나타 보게!!”
“진...진정해, 카게야마.”
“미, 미안.”


오늘 하루 동안 카게야마의 토스를 놓친 것도 여러 번이었고 서브 실수를 하거나 리시브 실수를 한 횟수도 많았다. 연습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히나타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도록 해.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


감독님도 그런 내 상태를 눈치 챘는지 연습을 일찍 끝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카게야마는 아직도 화가 나있는지 얼굴을 찌푸린 채 걷고 있었고 선배들은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히나타 무슨 일 있는 거야?”


스가 선배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오늘 저 때문에 연습도 잘 못하고 정말 죄송했습니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선배들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카게야마를 향해서도 조그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미안하다, 카게야마...”


내 말에 카게야마도 조금 놀랐는지 날 쳐다보았다.
나는 먼저 가겠다고 말한 뒤 자전거를 탔다.

사실 오늘 하루 머리 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사람들에게 말 못한 비밀이 하나 있는데 나는 켄마와 사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주면 켄마와 사귄 뒤 처음 맞는 켄마의 생일이었다.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나는 켄마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늘도 켄마의 생일 생각으로 하루 종일 머리가 복잡해 연습에 집중하지 못했다.
스가 선배나 시미즈 선배, 야치 같은 사람들에게 상담이라도 받고 싶지만 켄마와 사귄다고 말하는 건 둘째 치고 이런 고민 때문에 연습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했다.


“하아.”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어쩌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켄마가 기뻐해줄까.


“다녀왔습니다.”
“오빠!”


내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문을 열자 나츠가 현관 앞에 나와 있었다. 분홍색 잠옷을 입고 있는 나츠는 입가에 밥풀이 묻어있었다. 아마 저녁을 먹다가 내가 오는 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 나왔겠지.


“나츠!”


나는 나츠를 안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나츠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잘 다녀왔어, 오빠?”
“응!”


나는 나츠를 내려놓고 부모님께도 인사했다.
부모님은 저녁을 먹고 씻으라고 했지만 지금은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기에 거절하고 바로 씻으러 들어갔다.


씻고 나와 포근한 이불 위에 누웠다. 어느새 밥을 다 먹은 나츠가 내 방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나츠?”


나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 있어 오빠?”


아차, 평소에도 눈치가 빠른 나츠가 내 표정이 별로 좋지 못했다는 걸 알아챘나보다. 이런 괜히 나츠까지 걱정시키고 말았잖아...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나츠.”
“정말?”
“응, 물론이지! 저, 근데 나츠... 물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뭔데 오빠?”
“나츠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생일이라면 나츠는... 그 사람한테 뭘 해주고 싶어?”


내가 어린 동생에게 무엇을 질문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상담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도 나츠한테 물어보는 건 아니었잖아. 이 히나타 바보 자식!
자괴감에 점점 더 빠져들 때쯤 나츠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내게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제일 좋아하는 걸 해주고 싶지! 나는 오빠가 맛있는 걸 좋아하니까 오빠 생일날 오빠에게 맛있는 걸 아주 잔뜩 주고 싶었는걸!”


켄마가 제일 좋아하는 것?
그래 켄마가 제일 좋아하는 걸 선물로 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잖아!
어지러웠던 머리가 한 번에 정리되었다.


“넌 천재야 나츠!”


나츠를 놀아주고 나츠가 자러 방으로 돌아 갈 때 쯤 나는 휴대폰을 들어 켄마에게 문자 하나를 보냈다.


‘켄마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건 뭐야?’


1분도 채 안 지나서 켄마에게 답장이 왔다.


‘쇼요.’


순식간에 내 얼굴에 열이 올랐다.
켄마 이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왜 이런 부끄러운 문자를 보내는 거야!
나는 이불 위를 뒹굴어 다녔다.


다음날 아침, 다크서클이 눈 밑까지 내려앉았다. 켄마의 문자 때문에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래도 밤사이에 켄마를 위한 계획 하나를 세울 수 있었다.



                                                                                                                                     *          *          *



연습이 다 끝나고 씻고 들어와서 침대에 누워 게임을 하고 있을 때 휴대폰에 알림 하나가 왔다. 휴대폰을 집어 확인해보니 히나타에게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켄마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건 뭐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금방 답이 나왔다. 내가 지금 좋아하는 건 쇼요말고 없잖아.


‘쇼요.’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한참이 지나서야 왔다.


‘알...알겠어!’


문자에서 쇼요가 내 문자를 받고 얼마나 당황했는지가 느껴졌다. 분명 얼굴이 새빨개져 있겠지.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귀엽다, 쇼요.

며칠이 지나고 학교에 가보니 쿠로가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오야, 켄마 왔냐?”
“그건 뭐야?”


내 질문에 쿠로가 잠시 벙진 표정을 짓다니 픽 웃었다.


“켄마 너 설마 오늘이 생일인 거 까먹은 건 아니지?”
“아.”


오늘이 내 생일이었던가? 평소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생일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여기 선물. 맛있는 거 사왔어. 생일 축하한다.”
“고마워.”


쿠로가 준 선물을 들고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아침마다 오던 쇼요의 문자가 오지 않았다. 늦잠이라도 잔걸까.
점심시간 때쯤 교실 문이 쾅하고 열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리에프와 이누오카가 교실로 뛰어 들어왔다.


“켄마 선배 오늘 생일이라면서여?!”
“생일 축하드려요!!!”


리에프와 이누오카는 학교 매점에서 파는 빵과 우유를 내게 가득 내밀었다. 시끄럽네.


“고마워.”


내 말에 녀석들은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키도 큰 녀석들이 교실 안을 뛰어 다니며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보다 못한 쿠로가 그 녀석들을 진정 시켰다.


“축하해주는 건 좋은데 여기가 2학년 교실이라는 건 기억해라, 이 사고뭉치들아.”


그제야 자신들이 2학년 층에서 난리를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죄송하다고 외치고는 교실을 재빠르게 나갔다. 역시 바보들.
그 뒤로 야쿠, 야마모토, 유우키등 여러 사람들이 생일 선물을 주었다.


“인기 많네, 켄마.”


옆에서 쿠로가 말했지만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게임을 했다. 쿠로도 딱히 내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닌지 자기가 할 일을 했다.
오늘 아침부터 계속 오지 않는 쇼요의 문자가 신경 쓰였다.

결국 쇼요의 문자는 학교가 끝날 때까지 오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걸 쿠로가 봤는지 내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켄마?”
“아니.”
“너 표정이...어?”


쿠로가 말을 하다 말았다. 쿠로를 쳐다보니 많이 놀란 듯이 앞을 바라보았다. 뭐지? 나도 쿠로를 따라 앞을 보니 쇼요가 교문 앞에 있었다.
쇼요가 여길 어떻게?


“쇼요?”


쇼요가 나를 보며 웃었다.


“안녕, 켄마. 생일 축하해!”


히나타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 소중히 안고 있던 종이팩을 내게 주었다.
나는 너무 놀라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미야기에 살고 있는 쇼요가 어떻게 도쿄에 와서 학교로 찾아 온 걸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쇼요가 당황했다.


“켄, 켄마 내가 아무 말 없이 와서 화난 거야? 나는 너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어서...! 생일  날에는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걸 주고 싶었는데 네가 나, 나라고... 말했으니까...그래서 내가 왔어!”


쇼요의 말에 저번에 했던 문자가 떠올랐다. 내 생일 때문에 물어본 거였구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말 최고의 선물이잖아, 쇼요.
내 말 한마디에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온 쇼요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다.
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쇼요를 끌어당겨 안았다.


“정말 고마워.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야, 쇼요.”


내 말에 쇼요가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응!”
“오야오야 다 좋은데 내가 옆에 있다는 걸 까먹지 말라고.”


쿠로가 민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용해, 쿠로. 난 오늘 쇼요랑 같이 갈테니까 먼저 가.”


쿠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애초에 커플 사이에 껴서 갈 생각도 없었다고. 재밌게 놀아라, 켄마 그리고 꼬맹이.”


쿠로가 먼저 가고 나는 쇼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갈까 쇼요?”
“좋아.”


처음으로 생일을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쇼요가 함께라면 즐겁지 않은 게 없었으니까. 배구도, 사랑도.








W.  키 르 ( @ J i n g 0 3  0 )

‌켄 마 에 게  케 이 크 를

‌“나는 그를 영원히 소유하고 싶었다.
그를 훔쳐 어디 먼 벼랑 끝에다 집을 짓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 숨겨두고 싶었다.”

‌한뼘노트, 황경신


‌* 케이크버스au(@Rune_communicat)
* 얀데레 요소 있습니다.
* 짝사랑 소재 있습니다.
* 사망 소재 있습니다.



    켄마. 켄마.
    날카로운 발톱. 밤에도 빛나는 눈. 코즈메 켄마. 
    가냘픈 몸짓. 무감한 입술. 코즈메 켄마.
    켄마는 히나타 쇼요에게 유달리도 다정하구나.
    왜? 왜?
    왜 그러니, 코즈메 켄마.

    ……, 그야,

    쇼요를 잡아먹으려고.



‌                                                                                                                                     *          *          *



    "쇼요."

    켄마가 나긋하게 손짓했다. 겨울방학을 맞이해 또다시 방문한 도쿄. 자율 연습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는 도중 켄마는 답지 않게 미소까지 띠우고서 속삭였다. 이리 와, 쇼요. 히나타는 부드럽게 미소 짓는 켄마를 보며 덩달아 웃었다. 켄마가 기분이 좋아 보여 저도 모르게 들뜬 탓이었다.


    "켄마-! 무슨 일, 우읍?"


    켄마는 속으로 낮게 혀를 차며 히나타의 입을 아프지 않게 틀어막았다. 탐스럽게 익은 분홍빛 입술, 그 새빨간 속살까지 모두 보여주려는 듯 한껏 목청을 높이는 히나타 때문이었다. 갑작스레 입이 막힌 히나타의 머리 위로 물음표 열댓 개가 단숨에 떠올랐다. 입을 막아놓아도 쇼요는 쇼요인지라, 몸놀림이 하도 유난스러워 시끄럽다는 착각이 일었다. 작은 체구이면서도 누구보다 눈에 띠는 게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오늘은 그러면 곤란했다. 켄마는 가만히 쇼요를 바라보다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제 연인은 태양처럼 온 세상을 비춘다. 모든 이가 그를 바라보고, 그 또한 사람들을 좋아했다. 켄마는, 그런 히나타가…,


    "이으우으응우응?"


    쇼요는 입이 막힌 채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입이 막혀있는데도 목소리가 밝고 우렁찼다. 켄마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쇼요를 향해 다정한 눈빛을 보냈다. 쇼요의 맑은 눈동자에 고요히 웃고 있는 켄마, 저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의 눈동자 속 코즈메 켄마는 꽤나 흡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귀여운 쇼요. 향기로운 쇼요. 쇼요는 제 손을 떼어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꽤 답답하고 당혹스러울 텐데 둥그렇게 눈을 뜨기만 할뿐 그저 켄마의 뜻에 따라, 켄마가 원하는 대로 저 자신을 내맡겼다. 저에 대한 깊은 신뢰감이 묻어나는 행동. 어여뻤다.


    "쉿. 쇼요. 비밀얘기야."
    "비, 비밀얘기?!"


    입에서 슬며시 손을 떼어주며 속삭이자, 쇼요는 어린아이 앞에 달콤한 사탕을 들이민 것 마냥 두 눈을 빛냈다. 기대감에 화악- 풀어진 얼굴이 이내 붉게 상기되었다. 제게는 없는 순진하고 순선한 모습. 사랑스러운 쇼요. 달콤한 쇼요.

    쇼요는 두근거려 미치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켄마의 눈앞에 자그마한 귀를 들이밀었다. 순간 아찔한 감각에 휩싸인 켄마는 질끈 눈을 감았다. 단내가, 코끝을 찌른다. 저도 모르게 말랑한 귓불을 콱. 다행히 이를 세우지는 않았다.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겹도록 교육받고 훈련받았으니까. 그럼에도 쇼요는, 쇼요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혀를 둥글게 굴린다. 질척한 소리는 입술 사이로 삼켜졌다. 대신 쇼요의 귓바퀴를 타고 들어가 부끄러운 소리로 청각을 자극한다. 찔걱이는 소리에 몸이 다는지 쇼요가 흐으, 하고 애끓는 숨결을 흘렸다. 축축한 타액을 타고 달디 단 그의 살결이 녹아들었다. 아. 달아, 쇼요. 쇼요, 너는 너무 달아.


    "케, 켄마. 여기서 이러면…!"


    주변 눈치를 살피면서도 사랑받는 행위에 두 뺨을 붉게 물들이는 게 귀여웠다. 그가 좋아해 마지않는 켄마가 자신의 천적인 포크인지는 짐작도 하지 못하고서. 하긴, 포크는 케이크를 살육할 잠재적 범죄자로 분류되어 발현 즉시 사회의 통제를 받게 되니까, 제 앞에 포크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테지. 켄마는 날카롭게 눈을 치뜨며 여전히 입에 물린 쇼요의 살결을 핥아댔다. 네가 아무것도 몰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포크인 켄마가 여즉 평범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데에는 집안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사람을 매수하고 결과를 조작, 그러고도 안심되지 않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도시 외곽의 평범한 학교로 켄마를 진학시켰다. 그 근처에서 켄마가 포크인 것을 아는 건 어릴 적부터 코즈메 가의 가신이었던 쿠로오뿐이었다. 다행히 켄마는 원체 식욕이 없는 편이고 본능을 억누르는 능력도 탁월했기에 금세 사회로 내보내졌다. 켄마는 자신이 본능을 잘 억누른다기보다는 신체활동을 귀찮아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얘기하는 것마저 귀찮았다면 설명이 될까. 어쩌면 얇은 환자복 하나만으로 몸을 가린 채 낯선 사람들에게 관찰당해야 했던 연구실을 어서 벗어나고 싶었던 걸지도.


    "으흐응…."


    무심코 귓바퀴를 잘근거리자 히나타가 작게 칭얼거리며 목 언저리를 비틀었다. 열이 오를 대로 올라 촉촉한 목덜미. 희게 드러난 목덜미를 한 움큼 물어뜯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한입만, 딱 한입만 집어삼킬까, 진지하게 고심하다 결국 행동으로 옮긴 건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처박고 달큰한 체향을 산소삼아 들이마시는 것뿐이었다.


    "…, 별장에 놀러와. 쇼요."


    합숙이 끝나는 대로 바로.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야. 우리 둘만. 재미있을 거야. 맛있는 것도 잔뜩 준비해놨어. 쇼요가 오지 않으면 다 버리고 말거야.

    쇼요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며 웅얼거리자 '우앗-! 먹을 거 버리면 안 돼, 켄마!' 라는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욱 고개를 파묻으며 비싯 웃음을 흘렸다. 보이지 않도록. 들키지 않도록. 너는 모를수록 좋았다. 그 편이 훨씬,

    잡아먹기 쉬우니까.


    "그럼, 놀러 오는 거지?"
    "물론이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응! 켄마 마음대로 해!"


    나의 쇼요. 사랑스러운 쇼요. 나의 달콤한,

    케이크.



‌                                                                                                                                     *          *          *



    "우왓! 켄마! 별장이 엄청 넓어!"


    하얀 눈이 내린 울창한 숲은 마치 동화 속 풍경과 같았다. 먼 나라의 성탄절처럼 침엽수가 우거진 산 속, 그 깊은 곳에 자리한 숨겨진 별장이 바로 켄마의 소유였다. 오래 비워두었던 별장은 냉기가 돌아서 켄마는 익숙하게 난방을 틀었다. 따뜻하게, 혹은 뜨겁게. 옷이 얇을수록 네 살결이 드러날 테니.

    쇼요는 투명한 성정을 갖고 있어서 조금만 수를 쓰면 언제나 켄마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었다. 이번에도 쇼요는 켄마가 원하는 대로 헐벗어 줄 것이 분명했다. 조금 있자 히나타는 덥다며 연습할 때 입던 반팔, 반바지를 꺼내 입고 널따란 내부를 신나게 뛰어다녔다. 켄마는 정신 사나운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히나타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건 꽤 봐줄만 했다. 포크인 켄마만 맡을 수 있는 히나타 특유의 체향이 별장 안을 가득 채웠으니까.

    아. 그래. 지금 켄마의 주위에 가득 찬 것은 쇼요의 향이었다. 의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코즈메 켄마가 유일하게 소유욕이라는 걸 내보이는. 그의 식욕을 돋우는 향신료. 히나타 쇼요. 케이크, 쇼요의 향.


    "케, 켄마?"


    풀썩.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방방 뛰어다니던 쇼요가 제 밑에 깔려있었다. 과하게 푹신한 소파가 눕혀진 모양 그대로 푹 가라앉았다. 방방 뛰어다니는 걸 잡아채듯 끌어다 내리누른 건 본능에 가까웠다. 혀가 미끈거린다. 식욕이 돈다.


    "저, 저기. 켄마! 나 아직 씻지도 않았고…! 그러니까…!"


동시에 사랑스러운 제 연인에 대한 애정도 피어오른다. 허둥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히나타는 오로지 켄마 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양 어여쁘고 마음에 꼭 들었다. 켄마는 미소를 지었다. 히나타가 좋아하는 옅은 미소. 그러자 제 아래 깔려있던 생기 넘치는 육체가 조금은 긴장을 푸는 게 느껴졌다. 그 틈을 타 켄마는 히나타의 먹음직스런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씻지 마, 쇼요. 쇼요 냄새는 좋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쇼요의 목에 팔을 둘러 바싹 끌어안았다. 켄마는 전쟁 끝에 안식처를 찾은 사람처럼 안도하는 동시에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쇼요의 달짝지근한 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흐앗, 케, 켄마! 목덜미를 스치는 연인의 숨결에 쇼요가 소스라쳤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몸을 더 밀착시켰다. 아무리 울먹거려도, 그만 둘 생각 없으니까.

    지독히도 달큰한 향이 정신을 어지럽혔다. 뇌에 연기가 낀 것처럼 몽롱한 기분. 아. 쇼요. 어쩌면 좋지. 먹고 싶어. 먹고 싶다, 쇼요. 먹고 싶어. 먹고 싶어, 쇼요. 본능적으로 가장 짙은 향이 풍기는 뒷목께에 입술을 박고 쪼옥 빨아들였다. 쇼요가 화드득 놀라며 허리를 튕겨 올렸다. 어깨를 잡아오는 손길은 밀어내는 듯, 보채는 듯. 아아. 입 안 가득 단맛이 퍼진다.


    “하아….”


    뜨거운 숨을 내쉬며 길게 혀를 내밀어 약해진 살결을 진득하게 핥아 올렸다. 하얀 살결에 붉은 자욱이 열꽃처럼 선명했다. 그 위를 켄마의 새빨간 혀가 한 번, 또 한 번 지나갔다.


    "흐읏, 켄마…!"
    "응. 응. 괜찮아. 쇼요."


    애타게 제 이름을 부르며 팔을 꾸욱 쥐어오는 쇼요에게 정신없이 대꾸했다. 자신이 뭐라 말하는지도 모른 채 켄마는 쇼요의 턱선을 따라 잘게 입을 맞추었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어린애 같은 뺨이 예뻐 축축한 입맞춤을 선사한다. 뜨겁고 적나라한 혀의 움직임에 흣, 하고 쇼요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반응이 만족스러워 작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쇼요가 케이크였기에 관심을 보인 건 맞지만, 이 웃음은 단지 먹이를 향한 것이라기엔 어폐가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쇼요를 볼 때마다 침이 고이는 건 켄마에게 있어 쇼요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어떻게 이런 존재가 있지? 켄마는 사랑스럽다는 듯 쇼요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불안해하던 쇼요가 안심할 수 있도록. 켄마는 히나타 쇼요를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있도록.

    상냥하고 나긋한 접촉에 불안을 떨쳐버린 쇼요는 더욱 먹음직스럽게 부드러워진다. 몸도, 표정도, 향기도. 유들유들해진 쇼요의 허리 뒤로 손을 받치고 들어 올려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판판한 배에 입을 맞추었다. 뜨거운 살결과 살결이 부딪치고, 새빨간 혀가 갈비뼈 위를 핥고, 배꼽 주위를 희롱하다 힘주어 빨기도 한다. 사탕을 녹이듯 살살 굴리면 켄마가 맛보는 것과는 별개로 쇼요는 몸이 달아 흐느꼈다. 켄마는 그 솔직한 반응이 퍽 마음에 들어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제 몸을 음미하며 놀리듯 웃는 켄마로 인해 쇼요는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되어 안 그래도 탐스러운 몸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하얗고 쫀득한 피부가 적당한 온도로 데워지면 켄마의 눈이 묘하게 번뜩였다. 하얀 가루를 묻힌 보드라운 떡인 듯 손에 쥐어지는 살이 미치도록 먹음직스러웠다. 잘 익은 과실마냥 한입 가득 베어 물면 육감적인 과즙이 터져 나오듯 흘러내려서는 턱 아래를 적시겠지. 혓바닥 아래로 침이 고였다. 입안이 근질거린다. 뻐근한 아랫배가 불편해 연한 연인의 몸에 아래를 문질렀다. 아. 고개를 쳐들며 켄마의 입에서 나른한 숨이 터져 나왔다. 살풋 눈을 감으며 그 찌릿한 기분을 음미한다.

    사랑스러워서 그의 온몸을 탐하는 걸까, 아니면 먹이를 삼키려드는 짐승의 식욕에 불과한 걸까. 사실, 어느 쪽이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코즈메 켄마가 히나타 쇼요를 가질 거라는 것. 온전히 제 손에 쥐고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것. 그리고, 그리고 매일 밤 이렇게 너를….

    허리를 숙여 쇼요를 내려다본다. 씨근덕대며 몸을 부딪치다보니 옷이 잔뜩 흐트러져버린 쇼요. 히나타 쇼요. 그 애가 제 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내리누르며, 켄마는 도드라지게 드러난 히나타의 장골에 입술을 대고 유독 그곳을 할짝였다. 아흐윽…! 켄마! 히나타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그곳은 유독 히나타가 잘 느끼는 곳이었다. 가려운 느낌이 낯설어 히나타는 허리를 비틀어 피하려했지만 켄마는 단단히 히나타의 골반을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른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히나타는 아찔한 정신 너머로 생각하다 곧 그만두었다.


    "흐으. 켄, 마…!"


    켄마가 쇼요의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려 가느다란 발목에 짙게 입을 맞추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저 발목일 뿐인데, 켄마가 하면 달랐다. 제 다리 사이에서 여왕님처럼 군림하며, 도도하게 치켜 올라간 나른한 눈이 새빨개진 저를 집요하게 관찰해대니 발끝이 다 곱아들었다. 켄마, 나, 나, 이상해. 이상해! 들려진 다리가 발발 떨렸다. 제 몸이 제 몸 같지가 않아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아. 정도껏 예뻐야지. 쇼요.

    참고 참다가 무언가 폭발하듯, 조금은 다급하게 쇼요의 몸을 탐했다. 좋은 향기가 나는 얄따란 손가락을 쥐고 기다란 막대사탕을 먹는 것처럼 쪽쪽거리며 빨았다. 혀를 굴려 손가락 사이를 헤집고 눈을 감으며 쇼요의 체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혀와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생생했다.


    “하으으…. 켄마. 그만….”


    슬쩍 눈꺼풀을 밀어 올리면 양 볼을 붉게 물들인 채 움찔거리는 쇼요가 시야 가득이었다. 그만이라니. 누가 할 소린데. 자꾸만 행동을 종용하는 건 너다. 그런 식으로 몸을 뒤채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가만히 둬. 팔에 힘을 주어 흐늘거리는 다리를 벌린다. 보드라운 허벅지를 잔뜩 괴롭히다가 한손 가득 쥐어지는 매끈한 종아리를 잘근잘근. 소파를 쥐고 파르르 떨며 흐느낀다. 응, 응, 괜찮아. 쇼요. 반사적으로 중얼거리며 두 팔 가득 쇼요를 끌어안았다. 맨살을 맞대고, 매끈한 살결을 빈틈없이 맛보겠다는 듯 조금씩 타고 올라가며 잇자국이 나도록 짓이겼다. 마치 정복하는 것처럼 한군데도 빠짐없이, 지독히도 괴롭혔다. 붉은 자욱들이 온몸 가득 새겨졌다. 전부 켄마가 맛본 곳이었다. 그중 어느 곳도 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쇼요의 온몸이 달았다. 전부 달고, 그야말로 그의 전부가 환상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눈앞이 핑핑 돌았다.


    "켄, 마…. 흐으, 읏, 흐."


    몸이 너무 뜨거워 겁이 나는 지 쇼요가 애처롭게 저를 올려다보았다. 너무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쇼요, 알고 있어? 내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 건지. 다시는 너를 못 보는 게 싫어서, 너에게 미움 받는 건 이제 무서울 지경이라 상처 하나 못 내고, 살점 하나 물어뜯지 못하고, 네 살결에 입 맞추고 간신히 입술을 떼어 내야하는 나를. 알 수 있을 리 없지.

    애정, 그리고 조금은 원망스러운 마음을 담아 콱, 그의 어깨에 이를 박는다. 아…! 고통인지 뭔지 모를 신음이 귓가를 타고 흐른다. 정통 클래식에 뒤지지 않을 만큼 듣기 좋은 선율이다. 꼭 향기로운 생크림을 가득 삼키는 기분. 조금 더, 조금만 더 그를 느끼고 싶어 조급하게 혀를 움직이고, 아릴 정도로 달콤한 향이 풍기는 그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간다. 꿀물처럼 달디 단 액체를 정신없이 핥아낸다. 으음…. 켄마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샌다. 일종의 감탄사였다. 위험하다. 정신을, 차려야지. 잘못하면, 내가, 너를, 먹어버릴지도.

    황홀한 감각을 선사해주는 쇼요를 위해 애써 본능을 죽인다. 포크가 식욕을 참기란 고행을 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참아낸다. 죽겠느냐, 숨만 쉬며 살겠느냐 묻는다면 숨만 쉬며 살겠다 대답할 것이었다. 쇼요는 숨이었다. 입 속에서 유연히 움직이는 부드러운 살덩이를 물어뜯지 않도록 조심하며 살며시 원을 그린다. 간지러운 느낌은 식욕과 쾌감의 합이었다. 고른 치아를 훑고 예민한 분홍빛 살점을 쓸어 올린다. 그러면 쇼요는 뭐가 마려운 강아지처럼 자꾸만 낑낑거리며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아. 이래서야 놓아줄 수가 있나. 제 품에서 생생히 살아 파득거리는 쇼요라니. 아무리 내가 포식자이고 너는 먹이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어떻게 내가 네 숨통을 끊어.


    "하으. 하아…. 으응…."


    쇼요의 향에 질식할 것 같아 고개를 들면, 잔뜩 열이 올라 헐떡이는 쇼요의 말간 얼굴. 그 위로 투명한 눈물이 똑 떨어진다. 넥타르(nectar), 향기로운 액체 한 방울이 또 켄마를 유혹해왔다. 본능적으로 움찔거리는 손을 반대편 손으로 꾸욱 잡아 눌렀다. 당장이라도 탐스런 육체를 찢어발겨 입 안 가득 물고 싶은 걸 간신히, 간신히 참아낸다. 턱에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입 안 가득 네가 번질 텐데.

    하지만 고작 한 번의 황홀경을 위해 너를 잃을 수 있나. 네 향기, 체온, 잃어버린 미각을 풍부히 자극하는 네 몸이 사라지는 걸 내가 어떻게 견뎌. 두고두고, 가능하다면 평생, 매일 조금씩 너를 맛보는 게 훨씬 현명하다. 너는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알고 있어, 쇼요? 내가 1분에도 몇 번 씩 널 짓이겨 삼키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린다는 거? 극한까지 본능이 충동질해도 매번 참고 돌아선다는 건? 응? 쇼요, 알고 있어?

    어금니를 꽉 물어 부들거리면서도 겨우 축축한 혀만 내밀어 네 눈물을 삼켜주는 나를, 알고 있어? 응? 쇼요.



‌                                                                                                                                     *          *          *



    "자. 코코아."
    "아! 고마워. 켄마."


    히나타는 하얀 시트에 둘둘 감긴 채 손만 쭉 뻗어 코코아가 담긴 머그잔을 받아들었다. 켄마는 침대 맡에 기대 서 방금 씻고 나와 촉촉이 물기를 머금은 오렌지 빛 머리칼 사이를 헤집었다. 마른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느낌이 중독되리만치 부드러웠다. 그 사이 히나타는 하얀 김이 폴폴 올라오는 코코아에 혀를 데면서도 달콤한 초콜릿 맛이 좋아 그것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조심해야지, 쇼요. 상처 나면, 아깝잖아. 내가, 너 다칠까봐, 어떻게 참은 건데. 꿀꺽, 켄마는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억지로 삼켜냈다. 쇼요는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좋으니까.


    "으응…."
    "쇼요. 졸려?"


    히나타가 잠투정을 하는지 칭얼대며 졸리운 눈을 부볐다. 켄마는 금세 다 비워진 머그잔을 받아들어 협탁에 올려놓고 물에 젖은 것처럼 추욱 늘어지는 히나타의 몸을 침대에 눕혔다. 히나타는 저항도, 경계심도 없이 무방비하게 켄마 앞에 눕혀졌다. 흐트러진 모습이 퍽 먹음직스러웠다. 또 통통하고 보드라운 허벅지 살을 한 움큼 베어 물까 싶었지만,


    "…, 조금 자고 일어나. 쇼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지금은 다른 일을 처리하고.


    "으응. 그래도 돼?"
    "응."


    건조한 대답 뒤로 다정한 입맞춤이 이마에, 뺨에, 콧등에 쏟아져 내렸다. 졸린 눈을 끔뻑거리던 히나타는 켄마의 입술과 그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여서, 그리고 그보다도 뱃속이 더 간지러워 베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집에는 언제…, 가야하는데…. 자면 안 되는데…."
    "며칠 더 머물다 가, 쇼요."


    쇼요-, 하고 켄마가 말끝에 제 이름을 불러오면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주문이 되었다. 히나타는 몽롱한 정신 너머로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보상처럼 켄마의 입맞춤이 따라붙었다. 진득이 타액을 섞어오는 말캉한 혀가 노곤히 풀어진 히나타의 혀를 휘감고 엉켜들었다. 하으…, 달아오른 숨소리가 켄마의 귀를 적셨다. 아무리 케이크여도 숨소리마저 단맛이 날 리 없는데, 너는 숨소리마저 달았다. 쪽, 마무리를 짓듯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집에는 내가 이미 연락해 놨어."


    물론 거짓말이다.


    "… 눈이 녹을 때 즈음 집에 데려다줄게."
    "켄마, 좋아…."


    긍정의 대답인지 켄마가 좋다는 것인지 불분명한, 하지만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는 나른한 목소리를 끝으로 히나타는 잠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 비워진 머그컵 바닥에는 덜 녹은 코코아 가루와 함께 하얀 가루가 들러붙어 있었다.


    "… 잠 들었어?"
    "쿠로."
    "복 받은 꼬맹이인걸. 켄마가 손수 재워주다니."
    "불청객은?"


    발걸음 소리도 죽이고서 히나타가 잠들 때 까지 기다렸던 쿠로오는 씁쓸히 웃으며 켄마를 바라보았다. 제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고서 히나타의 머리를 쓰다듬는 켄마를 보는 건 꽤나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켄마를 떠나지 못하는 건, 이 고통이 꺼내 보일 수 없는 내 마음의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일까. 내 마음이 여기 이렇게 건재하다고 고통이 소리를 질러대는 게 만족스러워서, 그래서.


    "쿠로? 불청객은?"
    "아아. 네 말대로. 오고 있어."
    "…, 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이런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어?"


    나로는 안 되는 건가. 너한테 라면, 나는. 나는 너한테 먹혀줄 수도 있는데. 몇 번이나 물었던 질문. 참으면 터질 것 같아 내뱉었던 고백. 결의.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으로 돌아오는 건 언제나 고요한 눈동자뿐이었다.


    "응."


    어떤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쇼요를 데려와야 했어. 다정하게 굴어 경계심을 풀고 지금처럼 가끔이나마 만나는 게 가장 안전하겠지만, 이제 한계야. 알잖아, 쿠로. 한 달에 한번, 일주일에 한번으로는 이제 안 돼. 웬만한 케이크는 맛도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야. 자극 없는 삶을 살아본 적 있어? 쿠로, 쇼요가 없으면 난, 말라비틀어지고 말거야. 쇼요만 느낄 수 있어. 쇼요만이 나를 살아있게 해. 쇼요는 이제, 나만의 쇼요로 있어야 해.


    "부탁할게. 쿠로."


    그러니까, 나를 살리기 위해, 쇼요를 지켜줘.


    "하!"


    단호하고 명백한 대답이 함축된 음성에 쿠로오는 한손으로 얼굴을 쓸며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응.' 그 짧은 대답에 담긴 의미가 너무도 컸다. 감히 그것을, 쿠로오 테츠로가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중독. 쿠로오는 문득 중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켄마가 히나타의 부재에서 느끼는 건 중독 증세와 유사했다. 켄마에게 히나타 쇼요는 유일한 자극제이자 치료제 같은 것이었다. 잿빛 세상에 색깔을 불어넣는. 그 치료제에 중독 증세를 일으키는 환각 작용이 있는지는 나중 문제였다. 우선은 살아야했으니까. 그래서 쿠로오는 켄마를 막을 수 없었다. 살려야했으니까. 켄마를.

    아프다. 쿠로오는 고통에 찬 신음이 새어나올까 입술을 꽉 물었다. 짓씹힌 입술에서 피맛이 났다. 포크인 너이지만 내 피에선 쇠비린내 밖에 느끼지 못하겠지. 자조적인 생각에 상처 입는 건 결국 저 자신이었다. 심장께에 묵직하게 박혀드는 고통은 칼날의 그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비죽이 웃음이 나는 건 어이가 없어서? 아니면, 여전히 나는 고통을 즐기고 있는가. 괴로움의 크기는 비참한 사랑의 크기. 이 통증은 쿠로오 테츠로가 켄마를 위해 이만큼이나 희생할 수 있다는 반증.


    "예, 예. 말씀 받들어야지요."


    결국 쿠로오는 항복이라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옆으로 돌아섰다. 검은 머리칼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쪽만 켄마를 향하도록. 능숙하게 얼굴을 가린다. 언제나처럼 짓궂게 올라간 입 꼬리만 인상에 남도록. 잔뜩 힘이 들어가 벌게진 눈을 켄마가 보지 못하게.



‌                                                                                                                                     *          *          *



    "오야. 그쪽은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 말이야."


    산 중턱을 지키던 쿠로오는 눈에 익은 인영을 발견하고서 습관적으로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웠다. 상대는 쿠로오의 기세에 전혀 눌리지 않고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바보같이 올곧고 굳센 태도. 쿠로오는 착잡한 마음을 거둘 수가 없었다.

    히나타에 대해 발설치 못하도록 입을 막든가,


    "히나타 어디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면, 없앤다.


    "꼬맹이를 왜 여기서 찾지. 함께 돌아간 거 아니었어? 아, 도쿄에서 누굴 만나기로 했다고 차를 안탔던가."
    "히나타가 코즈메 씨와 얘기 나누는 거 봤습니다. 그리고 히나타 녀석은 거짓말이 서투르니까요."


    카게야마. 그에게는 협박 따위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코즈메 씨가 히나타에게 해를 입힐 것 같지는 않아서 조용히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스파이커를 멋대로 데려가는 건 곤란합니다. 집에서도 걱정하실 테니 제 선에서 히나타를 데려가지 못하면 선배들과 감독님께 알릴 수밖에 없습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집에서 히나타를 걱정할 것이다. 하루, 이틀, 일주일, 그때 즈음이면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겠지. 다 큰 고등학생이니 당장 조사에 착수하지는 않겠지만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히나타는 실종처리가 될 것이다. 그렇게 몇 년, 몇 십 년이 흐르면 사망처리가 될 거고, 그러면 아무도 히나타를 찾지 않게 될 것이다. 그때 비로소 히나타는 온전히 켄마의 것이 된다. 그러려면 일단, 카게야마가 사라져야한다.


    "…, 모른 척 해줄 생각은?"
    "없습니다."


    예상했던 답변. 그나마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쿠로오는 카게야마 한명을 막는 게 고작이었으니. 카게야마는 쿠로오보다 키는 작았으나 체력도, 힘도 한 수 위였다. 그리고 쿠로오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회는, 한 번. 쿠로오는 카게야마에게 달려들었다. 쿠로오가 제 몸을 날려 카게야마를 떠밀 것이라고는 카게야마도, 켄마도, 하다못해 쿠로오 자신조차 방금 전까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왜 그랬냐 묻는다면, 저 자신마저 사라져야 켄마와 히나타의 비밀이 온전해질 테니까? 글쎄, 그냥 할 일을 열심히 한 거뿐이라고 해두자. 아니면, 이제 조금은 지친 걸지도.

    갑작스러운 충돌에 중심을 잡지 못한 카게야마는 쿠로오가 원하는 대로 떠밀렸다. 몸을 낮추고 카게야마의 허리를 꽉 붙든 쿠로오는 어느 한 방향을 향해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그쪽은 낭떠러지가 있는 곳이었다.

    켄마. 내가 그랬지. 너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카게야마는 떨어지는 와중에 쿠로오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똑똑히 목격했다.



‌                                                                                                                                     *          *          *



    푸드득, 높다란 나무 위에서 새 서너 마리가 날아올랐다. 유난히 추운 숲에서 살아남았던 새들도 마침내 둥지를 떠나갔다. 생명의 기운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적막한 숲이었다. 죽은 듯 고요하고 온통 눈으로 덮여 신경 쓸 것 없이 희기만 했다. 겨울을 선택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관찰할 대상이 없었다. 저를 관찰하는 시선도 없이 오롯이 하얗기만 한 공간은 혹사당하던 눈을 쉬게 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산은 살아있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쇼요와 저만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켄마는 그것을 빠르게 인정했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다정으로 무장한다. 쇼요 스스로 저 자신의 발목을 묶어 제 곁을 떠나지 못하게. 이곳이 가장 아늑하고 안전 하노라 몸소 느끼고 깨닫도록.

    잠 든 쇼요의 보송거리는 머리를 쓰다듬고서 켄마는 얇은 외투만 걸치고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복이 쌓인 눈은 시리도록 차갑고 아름다웠지만 자연의 것이 아니었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부서지듯 새어나왔다. 추운 겨울이었다. 오래도록 추울 겨울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봄이 오지 않을 곳이었다. 그리고 눈 쌓인 겨울이 켄마에게는 봄이었다.

    쇼요. 눈이 녹으면 보내줄게. 이곳은, 눈이 녹지 않는 곳이지만 말이야.

    눈 쌓인 겨울이 켄마에게는 곧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