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누구보다 더 행복한 연인이었어. 그 전에 누구보다 서로를 더 잘 아는 친구였고.
내가 듣기로는 그 큰 친구가 먼저 고백했대. 그 고백은 또 어떻게 했냐면..뭐? 내가 어떻게 아냐고? 친한 사람인데, 나한테 그 얘기만 하루에 몇 번씩 했었거든. 서로 좋아하고 있었으면서 왜 그 오랜 시간을 숨겼던 건지.
아, 그래서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큰 친구 생일 일주일 전에 그 작은 친구가 선물을 사놓았었나봐. 나한테 계속 뭐 살지 물어봤다니까, 진짜. 얼마나 짜증나던지. 그래서 썬크림 사주라고 했더니 그거 샀대. 편지도 얼마나 정성스럽게 쓰던지. 차마 제가 좋아한단 말은 못하겠고, 그저 돌려서 쓰는걸 보는데, 이렇게 썼어. '나랑 지금까지 친구해서 고생했고 앞으로도 더 고생해' 저럴 바엔 그냥 고백하는 낫겠다, 안 그래?
그렇게 혼자 선물도 미리 사놓고 설레다가 생일 전날, 그 하루를 못 참고 선물을 주겠다고 그 큰 애를 불렀어. 학원에 가기 전에 좀 놀아달라는 핑계를 대면서. 자습도 30분이나 일찍 빼고 나가서 운동장에서 만났대. 제 딴에는 무심한 척하면서 선물을 줬어. 안에 편지도 있으니까 기숙사에 들어가서 꼭 보라고. 그 큰 애는 이런 짓 잘 안하고 오히려 귀찮아하던 애가 갑자기 이렇게 잘해주니까 기특했나봐. 머리를 그 큰 손으로 쓰다듬어줬는데, 어찌나 설렜다는지.
아, 왜 이렇게 흥분 하냐고? 감정이입 돼서 그래, 솔직히 설레잖아. 학원에 가기 전 10분 동안 뭐가 더 보고 싶었던지 계속 운동장을 맴돌았대. 그 작은 애 아버지가 차를 끌고 오시기 전까지. 사실 그 때 그 작은 애가 좋아한다고 모두가 알고 있던 애가 있었는데, 아..그..히나타? 맞아, 히나타 쇼요. 걔 좋아한다고 했는데, 제 말로는 그 큰 애를 좋아한다는 걸 부정하고 싶었다나 뭐라나. 별종이야, 그지? 제 말로는 설마 제가 친구를 좋아했겠냐면서, 곧 그런 마음 없어질 줄 알고 다른 애를 좋아하도록 노력해 본거였대.
그럼 어쩌나, 그날이 절정이었는걸. 히나타 쇼요 얘기를 하다가 그 큰 애가 계속 우리 결혼해야지, 소리를 했나봐. 그 작은 애는 헛소리 말라며 장난치고. 그렇게 잡으러 다니다가 작은 애의 손이 올려져있던 큰 애의 팔이 미끄러지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손을 잡아 버렸던거야. 방심했던 작은 애는 아차 했었지. 원래 친구들이랑도 손을 잡으면서 놀긴 하는데 얼마나 심장이 난리쳤던지 모르겠대. 아주 설렘이 폭발한 거지.
그 때 그 큰 애도 좀 의심스러웠던게 한 번에 손이 깔끔하게 잡혔다는 거야. 솔직히 이거 일부러 잡은 거 맞지? 그지? 아, 진정하고, 그래서 남은 3분을 손잡고 다녔대! 그 작은 애는 민망해서 손을 슬쩍 떼려고 했는데, 손을 안 놔줬다는거야. 으으, 내 심장이 다 떨리네. 그래서 그래서, 팔짱 아닌 팔짱을 끼고 있다가 그제서야 선물이 뭔지 확인한 큰 애가 작은 애 머리를 쓰다듬어줬대, 이렇게 잘 챙겨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이러면서.
사실 이게 처음이 아니고, 한 세 달 전쯤인가? 걔네 동아리..아 배구부 같이하는데, 그거 때문에 물건이랑 간식을 사러 갔다가 작은 애가 어쩌다 큰 애 못 지나가게 통로에서 막았대. 거기가 아마 카메라 사각지대에 엄청 좁은 데 였을거야. 거기서 나 좀 나오자, 라고 하면서 머리를 잡더니 쓰다듬어줬대. 그날 그 작은 애 하루 종일 싱숭생숭했다고 얼마나 나한테 난리를 쳤던지. 아무튼, 그렇게 해서 그날이 지나고, 그날 밤에 문자를 하는데 작은 애가 큰 애한테 오늘 너 생일이니까 나랑 특별히 놀자, 이렇게 보냈었대.
완전 티 나는 구만, 그 큰 애는 어땠을지 모르겠네. 그 큰 애가 흔쾌히 오케이 해서 작은 애는 영어 보충도 빼고 큰 애랑 매점을 갔어. 거기에 누구였지, 리에프..?가 따라갔는데, 같이 있다가 둘이서 되도 않는 사랑의 장난 하길래 그냥 왔대. 다른 커플 얘기 하면서 그 커플이 손잡고 있는 거 얘기하는데 그거 따라한답시고 손을 꽉 잡는 거야. 작은 애 말로는 그 전날 손 잡은게 실감이 안 나서 그때도 잡으면 똑같은 기분일까, 하고 궁금했대. 참 연애하기에 멍청하면서 누구 꼬시는 건 또 잘 하는 것 같단 말이지.
리에프를 먼저 보낸 것도 나름의 계략이었다 뭐라나, 아주 나쁜 애구만. 그래서 둘이 남게 되었는데, 매점 안에만 있기에 눈치 보여서 밖에 등나무로 나갔대. 가는 길에 큰 애 절친네 엄마 차가 보였대. 보쿠토였을거야, 아마. 친한지 오래 됐다던데. 큰 애가 보쿠토네 차를 보고 저기 안에 보쿠토네 엄마가 보면 나 완전 놀림 받을 텐데, 하며 작은 애랑 계속 걸어갔대. 그래서 작은 애가 뭐, 난 좋은데..이러면서 말을 흐렸지. 좀 당당하게 말하지, 보게네 보게.
자연스레 다시 연애 얘기로 바뀌었나봐. 큰 애가 갑자기 대담해지면서 능글거리는 말투로 들이대기 시작했대, 아마 전날에는 저도 당황스러웠겠지, 안 그러던 애가 선물도 챙겨주고 들이대기도 했으니까. 아마 작은 애 나름 용기 냈다고 생각해.
그래서 결혼하네 마네, 사귀는건 어떻고 보쿠토네 어머니한테 들키면 어쩧네, 하다가 큰 애가 작은 애 손을 덥석 잡더니, 우리 애인 만들까? 이랬어. 제가 여태까지 들이대다가 역공격을 당하니까 당황스러웠나봐, 갑자기 훅 들어왔으니까. 그래서 처음에 작은 애는 솔직히 그거 장난인 줄 알고 그래, 나야 이득이지 이랬어.
그때부터 둘의 연애는 시작 되었던거지. 작은 애는 아직도 장난인 줄 안 채, 큰 애의 배웅을 받으며 학원을 갔어. 학원에서도 문자가 꾸준히 오는데, 연인이라고 하기엔 말투가 딱히 바뀐 게 없어서 장난인가보다, 하고 집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자습반에 갔지.
그런데 배구 하겠다던 큰 애가 뒷문으로 데리러 내려왔더래. 뭐지, 하는 생각도 했지만 지금 둘이 사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한참 늦게 따라잡았지. 아, 우리 이제 썸 타는 건가 하면서 말이야.
큰 애가 자연스럽게 작은 애한테 어깨동무를 했어. 항상 하던 건데 아까 그 말 이후로 너무 두근거렸단 말이지. 그렇게 학교 전체를 계속 돌다가, 이제 진짜 들어갈 시간이 되니까 큰 애가 들어가지 말라고 붙잡았어. 그래서 그 작은 애는 그러지 말고, 얼른 들어가, 하고 달래며 겨우 자습반으로 갔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사귀고 있는 사이에서의 행동이었단 말이지. 그래서 리에프에게 이미 저와 큰 애 얘기를 들은 야쿠한테 가서 나, 아무래도 걔랑 사귀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하며 도움을 요청했지. 야쿠는 당황스러워하면서 뭐, 알겠어 하면서 작은 애가 내가 쿠로오를 불러내면 네가 물어봐, 하는 작전에 동참했지.
작은 애가 불러낼 때 바로 나온 큰 애를 보고 야쿠는 느꼈대. 아 얘네 진짜 사귀는구나, 하고. 그래도 작전은 작전이니까, 어, 너네 뭐야? 하고 운을 뗐지. 처음에는 작은 애의 리듬에 맞춰 열심히 부정하고, 뒤에서 좀 꼼지락 거리더니, 큰 애가 사실 우리 사귀는 거 맞아, 하고 덜컥 인정을 했다지. 작은 애도, 야쿠도, 내심 알고 있었겠지만 얼마나 놀랐겠어. 그 말을 들을려고 나온 거긴 한데, 진짜 둘이 사귀는 거라니, 하니까 뭔가 저를 치고 간 느낌이겠지.
삐진 야쿠는 들어가버리고, 큰 애랑 작은 애랑 둘이서 남아 이번엔 초등학교 놀이터 쪽으로 갔다가 둘이서 엄청 꽁냥거리고 왔지. 응, 우리 사귀어, 라고 인정하자마자 두른 어깨동무는 풀지 않은 채, 아직은 야쿠 외에는 그 누구에도 들키면 안 되었어서 숨어 다니며 학교에서의 데이트를 즐겼지.
그날 밤에 큰 애가 남긴 문자는 한 번 더 둘이 사귐을 실감시켜주었지. 잘 자, 켄마. 하는데 어떻게 자, 걔는. 한 시간 동안 혼자 좋아서 깨어 있다가 그대로 휴대폰을 꼭 안은 채로 잠들어버렸어. 어떻게 아냐고 자꾸 묻지 말아, 나도 너무 많이 들었던 거라 내 일 같다니까.
그래서 그래서, 하필은 방학 때 사귀는 바람에 사귀고 그 다음날 기숙사 문을 닫게 되어서 한 5일 떨어져 있었지. 큰 애는 배구 훈련이 빡세게 잡혀 있었고, 작은 애는 자습반에 박혀있었지. 그래서 되는 한 문자를 많이 하고 결국 만나진 못했어. 전화도 한 번 못하고, 얘네 은근 쑥맥이라니까.
그렇게 개학하기 전날 기숙사생들은 다음날이 개학이었으니 미리 짐을 들여놓고 자습반 애들은 그날도 여전히 공부 중이었는데, 그날따라 자습반 감독 선생님이 기분이 좋으셨던지 저녁시간을 한 시간 반이나 주신거야. 그때가 기회다, 싶어서 한 시간 반 동안 5일 못 본거 충당하느라고 그 더운 여름에 얼마나 붙어있던지. 이내 운동장 쪽으로 숨어버려서 다른 애들 보지도 못하고 말이야. 작은 애가 그러기를, 엄청 붙어 있었대.
큰 애가 작은 애를 끌어당기더니 어깨에 기대게 하질 않나, 조금 쑥쓰러웠던지 작은 애가 내빼니까 얼굴을 잡아서 볼에다가 얼마나 뽀뽀를 해대던지. 모르는 척 했지, 작은 애는. 그래도 아직 스킨쉽에 익숙한 애는 아니라서. 큰 애가 제일 윗 계단에 앉아있고 작은 애가 몇 칸 아래로 내려가니 눈높이가 비슷해졌지. 큰 애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작은 애를 쳐다보기도 하고 막 꼬집기도 하고 가만히 두질 못하고 있는데, 역시나 작은 애는 모르는 척..으유, 보게네 보게. 그때 맞춰줘야지 나중에 안 헤어졌지.
아, 스포했다. 아무튼, 허리를 붙잡고 끌어안았는데, 이런 행동 자체가 작은 애에겐 너무 처음이어서 심장은 터질 것 같고, 그런 작은 애가 좋아 죽을 것 같은 큰 애는 볼 뽀뽀를 반복하다가 갑자기 목으로 입술이 내려가더라고.
엄청 당황했지, 작은 애는.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애는 거기서 멈췄고, 딱 거기까지만 진도를 빼더라고. 정말, 키스도 안했는데 벌써 목이라니. 야한 애인 것 같아.
다시 자습반에 들어 가야해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지나가길래 큰 애가 작은 애를 낚아채듯이 잡아 끌어당겼어. 벽에 붙어서 껴안는 자세가 되어버렸지. 작은 애가 또 놀라서 아 뭐야– 하는 모습에 큰 애는 또 귀엽다며 머리를 쓰다듬았어.
아, 이때가 사귄지 9일 되었을 때의 얘기야. 그리고 며칠 더 갔던가...아, 13일까지 갔는데 그 남은 4일 동안 큰 일이 두 번이나 있었어. 둘이서 얼마나 살벌하던지, 보는 내가 무서웠다니까. 대청소를 하는데, 작은 애가 원래 다른 애랑 같은 당번이었어. 그래서 저번 학기에도 항상, 청소가 끝나면 매점으로 향하곤 했는데 그걸 보고 큰 애가 화가 난거야. 둘 사이에서의 첫 질투였겠지, 아마.
원래 성격은 좀 과묵하고 귀찮아하는 편이었지만 친구 관계 자체는 원만했던 작은 애는 대체 이해가 안 되었지, 큰 애가 화가 난 이유를. 종례 때까지 말도 한마디 안하고 휙 가버리니, 뭔가 이상한게 느껴졌을거야.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큰 애한테 전화를 해서 당장 나오라고 했지. 진짜 나한테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하면서 얼마나 난리를 쳤는데. 작은 애가 큰 애가 나오는 걸 보고 그 옆에 제 룸메이트가 있는 것도 무시하고 손을 덥석 잡더니 미안하다고 연신 그러는 거야.
작은 애는 그게 생애 첫 애교였대. 계속해서 미안해...쿠로 미안...응? 화풀어어...미안해...하는 작은 애의 모습에 큰 애는 화내려던 것도 다 없어지고 웃고 말았지.
켄마, 다음번엔 나랑 같이 가. 나 네가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거 싫어. 하는 큰 애의 말에 작은애는 다행이다 싶어 함박웃음을 지어보였지.
이게 첫 번째 고비였어. 뭐, 주말 내내 그 일 가지고 잔소리를 듣긴 했는데 아무렴. 그 주 주말에 둘도 포함해서 배구부원 몇 명이랑 밥을 먹으러 갔었대. 그날 아마 작은 애가 몸살이 나서 불덩이였다가 겨우 나가기 직전에 열이 내려서 겨우 나갔다던데. 리에프랑 야쿠랑 그리해서 갔었던 것 같아.
처음에 그 둘은 나름의 첫 데이트니까 어쩔 줄 몰라 하다가도 곧잘 손잡고 가더라고. 그래서 사진도 몇 장 남겨놨지. 작은 애가 보더니 엄청 쑥쓰러워 하더라. 밥을 먹으면서 그 큰 애가 저는 안 먹고 작은 애만 챙겼던 거 있지, 아주 앞에 있는 친구들은 안중에도 없고 엄청 그러더래. 너도 먹어, 하는데 알겠다고 대답하고 또 먹을 거를 작은 애 접시에 올려주더래. 어유, 누가 친한 내내 썸만 탔던 애들 아니랄까봐..아주 사귀니까 별 짓을 다 해, 정말..
한 두 시간동안 먹었다던가, 이제 헤어질려고 나왔는데 작은 애가 머뭇거리다가 큰 애 허리를 감싸 안는 거 있지, 야쿠랑 리에프 그거 보고 다들 자기 눈 버렸다며 욕을 하질 않나, 아무튼 둘 다 충격이었어.
귀여운 면이라곤 전혀 없는 작은 애가 여태껏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표정을 지어보였으니. 전날에 싸울 뻔했던 건 넘어가는 줄 알았지.
그런데 말이야, 얘네가 결정적인 일을 만났어. 아 뭐,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었는데 솔직히. 그 저번에 같이 매점 갔다가 큰 애가 화냈었잖아, 작은 애가 그 애랑 얘기하는 걸 큰 애가 본거야. 그래서 또 화가 난거지.
작은 애는 이해가 안됐대. 그러는 거 큰 애가 싫어하는 거 아니까 말 안했는데, 저 혼자 화나서 그러는 거라고. 저번엔 작은 애도 제가 잘못한 게 있다고 인정했지만, 이번엔 저도 화가 났나봐. 결국 둘은 하루 반나절 정도 말을 안했어. 아무래도 큰 애가 오해한 것 같은데 자존심 때문에 말 안한 듯 해.
결국 눈치 보다가 폭발해 버린 작은 애가 어느 화요일 저녁에 큰 애를 불렀어. 그리고 걔 말로는, 큰 애가 자기를 안 보길래 결국 이제 끝이지? 라는 말을 내뱉었대. 큰 애는 말리지도 않고 끝이야, 하며 그냥 나가버리고.
좀 어이가 없었지. 작은 애는 왠지 조만간 헤어지거나 싸울것 같아서 그렇게 된다면 큰 애에게 자기 잡아달라고 하려 했는데 이미 이렇게 끝나버렸으니.
자긴 해방이라며, 작은 애는 제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갔어. 연락하느라 못한 게임도 하고, 혼자 놀고.
그런데 그것도 얼마 안 가더래. 자기가 생각보다 큰 애를 많이 좋아한 것 같았대. 그래서 이별을 통보한지 이틀 만에 다시 잡았어. 쿠로, 어, 내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 우리 다시 사귀면 안 될까. 그게 먹힐 줄 알았어.
작은 애는 큰 애가 저를 피하는 게 제가 큰 애를 찼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돌아온 대답은 이미 마음을 접었어, 였던거야. 아, 좀 쪽팔리네. 알겠어. 미안. 이러고 걸어 나갔는데, 홈베이스에서 멍 때리고 있다가 지나가던 야쿠와 리에프가 저를 발견해서 뭐하냐고 하니까 눈물이 터지더래. 나, 다시 사귀자고 했는데, 어, 차였어, 하면서.
감정에 절대로 휘둘리지 않던 애였는데, 그런 것 때문에 우니까 야쿠도, 리에프도 당황했겠지. 괜찮다며 안아주기도 해보고 달래주기도 해봤지만 그 먹먹한 감정은 잘 가시지 않았나봐. 위로해줘서 고맙다고 하고 자습반에 들어가서 또 혼자 훌쩍였지.
큰 애도 좀 나빴던 게, 이틀 만에 어떻게 마음이 접히는지. 그럼 별로 안 좋아했다는거 아니야? 그날 저녁에 큰 애한테서 전화가 왔었는데, 그냥 안 받았어. 그리고 나서 며칠 후에 물어보니까 작은 애가 우는 걸 봤다는거야.
그래서 걱정 돼서 전화했는데, 이러니까 작은 애는 너는 네가 찬 사람이 너 때문에 우는 걸 걱정하냐면서 그냥 와버렸어. 나 얘 눈물 엄청 많은 거 처음 알았어, 진짜. 얼마나 펑펑 울던지.
큰 애 생일날 되어주었던 나름의 선물은 저에게 아무것도 되어주지 않았다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작은 애는 큰 애를 포기 못했던 모양이야. 예전처럼 지내자고 그랬다면서, 먼저 말 걸고 그러는 게 얼마나 한심했던지. 작은 애의 원래 성격도 다 바뀌어버린 것 같았거든.
항상 상처받을까 두려워하면서도 물러서지 못하는 걸 지켜보면, 얼마나 처절하겠어.
그 렇게 한 달이 지나고, 사귄 일 수 보다 헤어진 일수가 더 많아지고, 좋아했던 3년이 무색해질 때 쯤, 작은 애는 6키로가 빠져버렸어. 이별의 아픔이 이런 거였구나, 하는 걸 뼈 저리게 느꼈던 거지.
자 이제, 내 얘기를 시작해 볼게.
* * *
우리는, 왜 행복했던 시간을 버려두고 변하려했을까. 그저 나만의 욕심이었던 걸까. 여기서 조금 더 깊어진 관계란, 여전히 너에겐 부담이었을까. 바깥의 모든 걸 무서워한 내게 유일한 탈출구가 되어준 건 너였는데. 아직까지도 고쳐지지 않는 토하는 버릇에, 그런 애 하나 때문에 왜 네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 건데, 하는 친구들의 말에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어, 내가 그때 차라리 너와 싸웠더라면, 너 왜 그러는 건데, 하면서 욕이라도 했다면. 우리는 화해하지 않았을까. 첫사랑이란 이런 거구나, 하면서 그저 아픈 마음이 모두 나을 때 까지 난 기다려야 하는 건가 싶어. 쿠로, 어떻게 생각해. 아직도 내가 미운거야? 우리가 함께한 그 전의 긴 시간을 내팽겨칠 정도로?
오늘도 나는 매정한 너에겐 잊혀질 만한 짧은 13일을 그리워하고 있어, 네가 아니면 안 됐으니까.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것도 너였기에, 나를 알아줄 거라 생각했어. 나의 너무 큰 기대였을까. 이젠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우리 사이는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인 걸까. 오늘도 대답 없는 물음만 하다 눈물이 흐르면 잠에 들 것 같아.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 마음이 정리가 안 된 건 여전하고, 쿠로를 보면 아직까지 먹먹해지고, 쿠로의 모습을 눈으로 좇는 것도 여전하지만, 넌 모르겠지. 난 겉으로는 너무 완벽하게 회복되었으니까. 배구부도, 네가 주장이지만 나도 세터라는 중요한 역할이니까 눈치 보고 활동에 안 나올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했어. 이것도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려고. 우리는 왜 행복한 시간을 버려두고 변하려 했을까.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내가 만약 네 생일 전날 너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난 히나타를 계속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도 해. 만약 네게 내 진심을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할 말들을 매일 꿈속에서 연습해. 넌 그런 기회 주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도, 마주쳐도 말 할 기회조차 없을 텐데도. 가끔은 꿈에서 우리가 다시 화해하는 꿈을 꿔. 그게 현실인 줄 알고 아침에 네게 인사할 뻔도 했어. 네 생일날 준 선물이 나에겐 왜 이렇게 큰 아픔으로 돌아오는 걸까. 우리 이렇게 떠나지만 다시 돌아오길 바랄게, 하는 매일 자기 전 이 기도는 누군가가 듣고 있는 거긴 할까.
쿠로, 오늘은 내 생일이야. 내가 전부터 말했는데. 이 상황에서 축하 받기엔, 이거 진짜 욕심이지. 오늘 배구부도 가는데, 아무도 오늘이 내 생일인거 모르겠지. 내가 받고 싶은 생일선물은, 다른 게 아니라 너인데.
* * *
정말 귀찮다, 하며 체육관에 들어섰다. 내가 이거 어쩌다가 덜컥 하게 된 거지. 친구 따라 한 건데 그 친구 이제 남이 됐네. 요즘 따라 모든 일 하나 하나에 생각이 많아진다. 배구 할 컨디션도 아닌데, 오늘은 정말 빼고 싶었다.
-켄마상!
-어, 리에프.
-생일 축하해요!
뭐야 너네, 기억하고 있었어? 하는 말에 야쿠, 이누오카, 토라, 후쿠나까지 모두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이누오카의 손 위엔 애플파이가 들려있고, 어렵게 꽂은 듯한 초 몇 개도 보였다. 위태롭게 서 있는 초는 이누오카의 흔들림에 같이 움직였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냐며 애플파이를 들이밀었다. 선물...선물은 없어도 됐다. 그저 이런 축하 정도면은.
-켄마상 생일은 사실 쿠로상...아! 왜 때려요 야쿠상!
-리에프, 조용히 해.
쿠로, 쿠로였다. 이 날을 기억 하고 있었고 이제 다시 내 앞에 날 쳐다보며 서있었다. 늘 피하던 그 눈을, 내가 보고 싶게 되었다, 지금 볼 수 있게 되었다. 쿠로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낮은 목소리로 하는 그 한마디,
-어, 켄마. 생일, 축하해.
기뻐해야할까, 화를 내야할까, 슬퍼해야할까. 이건, 그저 부원에 대한 주장인 쿠로의 호의일뿐 인걸까.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는데, 표정에 변화가 없다고 다들 한마디씩 한다.
-아, 켄마상, 솔직히 놀란 척이라도 해줘요.
-나 놀랐어, 고마워.
-표정은 전혀 아닌데,
-리에프, 됐으니까 나 초 불어도 되지?
-켄마(상) 생일 축하해(요)
내가 분 촛불이 꺼지고 연기가 깔리면서 눈앞에 있는 쿠로가 어른거린다. 진짜 쿠로 인건지 나만의 환영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앞에 있는 쿠로는 내 생일을 기억해주었다. 이런 거에 괜한 안심과 기대를 하는 건, 내게 생긴 또 한 번의 용기이자 기회이겠지.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고, 다들 애플파이를 한 입씩 하고, 숨겨두었던 선물을 꺼내며 선물이 없으면 켄마가 슬퍼할 거라고, 내 팔에 한 아름씩 안겨주었다. 새 게임들, 그리고 또 포장해온 애플파이들. 선물 더미 위에 누군가가 새 배구공을 올렸다. 뭐야, 어떤 눈치 없는 놈이 배구공을 선물로 주는가 하는 생각에 올려다봤는데, 그게 쿠로였기 때문에 더 짜증났다. 나를 배구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사람, 그리고 나와의 시간을 하찮게 여겼던 사람, 그게 너였으니까.
오늘은 켄마 생일이니까 체육관 정리 짧게 하고 좀 놀다 가자- 하는 야쿠의 말에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 그럼 제 생일에도 같이 노는 거에요? 하는 리에프는 등짝을 한 대 세게 맞았다. 선물 더미들을 정리하기 위해 벽쪽으로 가는 날 보고 이누오카가 어, 켄마상, 도와드릴게요! 하며 따라 오던 걸로 들렸는데, 어느새 내 옆에 서있는 건 이쿠오카가 아닌 쿠로였다. 어찌할지는 모르겠어서 눈으로 흘깃하고 그저 묵묵히 선물들을 쌓아 가방 안에 꾸역꾸역 집어넣을 뿐이었다.
배구공이 둥글었기 때문에 굴러갔다. 게다가 내 발에 실수로 맞아 튕겨나가 내가 차 버린 것 처럼 보였다. 쿠로가 그걸 잡아들더니 다시 내게 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선물인데.
-...
-나랑, 이제 배구 같이 하기 싫어?
나한테 돌아오는 질문이 이거라니. 배구 바보 아니랄까봐, 이렇게 내가 배구보다 우선시 되는 건가 이젠. 표정관리가 유일하게 안 되는 이별 후 순간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떨렸고, 시선도 어디 한 곳에 멈출 수 없었으며, 소름이 끼칠 정도로 떨렸다. 아, 이 정도로 널 사랑하고 있던 거면 네가 내 옆에까지 와 준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 * *
그래서, 그 큰 애랑 작은 애 어떻게 됬냐면, 그냥 해피엔딩이야. 아 알겠어, 이제 내 얘기인거 뻔히 다 아는데 모르는 척 하지 말라고? 그냥 좀 넘어 가주지. 내가, 어, 이렇게 말했어.
-이런 관계인 이상 지금 당장 때려치고 싶은데.
-그만두지 마. 넌, 팀을 강하게 만들 거고
-..그 소리 할려고 온 거면 저리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거든.
쿠로 좀 괘씸하긴 했는데. 아니, 좀이 아니지. 많이 싫었는데, 정말 싫은 거랑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 아픈 거랑 다르잖아. 후자인 것 같아. 조용히 해, 나도 오글거리니까. 그래서 나도 이렇게 말했지. 그때 쿠로가 제 생일에 고백했던 것처럼.
* * *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개를 젖혀 쿠로를 쳐다봤다. 쿠로의 눈빛은 그때 날 바라봤던, 아니 여태껏 내게 보냈던 따뜻한 눈빛이고, 이런 쿠로를 보자 어디서 왔을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확신, 이번에는 잘 풀릴 거라는 확신.
-켄마, 미안해. 그땐 내 감정에 나도 모르겠어서..
-올해 내 생일선물로, 배구공 말고 애인 하나 선물해줄래?
대답은 없었다. 그때 하지 못한 키스로 답해주었다. 그와의 첫 키스는, 그가 내 목에 입맞춤을 했을 때 보다 더 짜릿했으며, 그의 볼에 항상 하던 입맞춤보다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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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뭐. 쿠로 너의 입술의 맛이 그리워! 내게 돌아와! 이럴 순 없잖아. 그땐 해 본 적도 없었는데.
-오야, 그것도 괜찮은데?
-아, 뭐래. 오늘 우리 집에서 밥 먹고 가. 엄마가 불렀어.
-근데 넌 항상 키스하고 싶을 때 표정이 있어.
-그런 거 없어, 그건 또 뭔 표정이야.
-입 맞춰주세요 우 표정?
-한 적 없어.
-있어.
-있다고.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