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ZUME KENMA  X  TSUKISIMA KEI



W.  산 우 ( @ w o o s a n o o )

검 은   고 성





   여기, 검은 고성이 있다. 달빛을 삼키는 고성에 한 남자가 산다. 남자의 이름은 코즈메 켄마다. 코즈메 켄마를 두고 사람들은 드라큘라 백작이라고도 하고, 희대의 마왕이라고도 하고, 영생을 사는 좀비라고도 한다. 그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또 아무도 모른다.

   옛날, 이 고성에는 사람이 아주 많이 살았다. 모두 코즈메 켄마를 주인으로 모셨다. 정원사, 청소부, 수리공, 요리사, 문지기……. 시간은 흘러갔고 코즈메 켄마만 남기고 그들은 다 죽었다. 지금 코즈메 켄마는 넓고 어두운 고성 속에서 혼자다.


코즈메 켄마는 영지의 주인이다. 육만 구천 몇 년 동안 쭉 그랬다. 흔히 영지의 주인들은 틈만 나면 남의 땅을 침범했다. 넘치는 혈기와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뿜다가 죽는다. 이유는 다양하다. 더 강한 자를 만나서, 방심해서, 혼자 폭주해서……. 온 땅을 헤집으며, 무고한 행인이 죽든 죄 없는 영지민이 죽든 상관치 않고 싸우는 것이, 그렇게 죽이다가 죽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요 인생이었다.


   코즈메 켄마는 좀 다르다. 좀처럼 힘을 뽐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가 힘 쓰는 일을 사실 매우 귀찮아 한다는 것을 아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영토에도 전쟁을 선포한 자들이 있었다. 귀찮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능력의 수준이 남다른 코즈메 켄마는 도전하는 자들을 한 칼에 베어냈다. 전쟁은 길어야 한 달, 대개는 보름 안에 끝이 났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도, 명예를 위해서도, 쾌락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영지민의 안전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일신의 안온함을 위해 코즈메 켄마는 누구보다 강건하게 영지를 지켰고 한동안 코즈메 켄마는 수호신이라고도 불렸다. 이 성에서 일하는 것은 모든 평범한 자들의 꿈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영지의 주인 아래로 모여들었고, 나이가 들었고, 죽었고, 그 다음 세대도, 또 다음 세대도 죽어…… 끝내 코즈메 켄마의 식솔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코즈메 켄마의 강력함만이 이곳에 남았다. 그의 전설적인 힘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세기가 흘렀다. 이제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으나 잠적한 성의 주인을 두고 소문은 커져만 갔다. 경쟁자의 목을 망설임 없이 내려쳤다던 그의 잔혹함이, 주변에 누구도 두지 않는다던 그의 몰인정함이, 도통 얼굴을 보이지 않는 그의 냉엄함이 전설처럼 괴담처럼 전해진다.


   그리고 구백 몇 년 만에, 이 검은 고성에 손님이 찾아온다. 안경을 쓴 냉막한 인상에 키는 멀대같이 큰 소년. 코즈메 켄마는 손수 성의 문을 열고 그를 맞았다. 드라큘라 백작, 마왕, 불사신 좀비를 죽이러 아주 멀리서 온 영웅, 츠키시마 케이의 등장이었다.



                                                                                                                    *          *          *



   여기, 검은 대지에서 온 영웅이 있다. 츠키시마 케이는 한 달 하고도 보름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검은 고성에 근접하자 주위는 온통 검은 나무만이 높게 솟아 하늘조차 보이지 않았고, 나무와 풀과 열매는 건드리면 독을 뿜었고, 들짐승 날짐승도 보이지 않았고, 그리하여 마지막 사흘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그저 걸었다. 그는 검은 대지 주민의, 군인의, 전사의 대표로 여기에 왔다.

   가까운 옛날, 신탁인지 전설인지 모를 말이 유령처럼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어느 위대한 영웅이 성으로 향하리라, 영웅이 검은 주인을 만나고 모두는 평온을 찾으리라. 검은 고성과 그 주인은 공포와 경외, 불안과 불행의 대명사였고 사람들은 마침내 나타날 용사를 기다렸으나 그 어떤 아이에게서도 아무런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는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했다. 갈망이 모여 어린 전사들을 키우고, 군인과도 같은 용병들을 일으키고, 끝내 영웅을 세웠다.


   근 백 년 간 첫 번째 영웅이, 두 번째 영웅이,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영웅이…… 뽑히고 길을 떠나고 소식이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흘렀고, 츠키시마 케이는 태어났고, 명석했고, 강했고, 민첩했고, 유연했고, 무엇보다도 냉철했다. 그렇게 츠키시마 케이는 열 몇 번째 영웅이 되었다. 영웅에게 포기란 있을 수 없었다. 믿음에 찬 형의 눈빛이, 희망에 찬 동기들의 응원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모험을, 도전을, 검은 고성을 향해 열 몇 번째 영웅은 느릿하게 걸음을 떼었다.


   영웅이라고 특별한 것은 없었다. 츠키시마 케이는 그 누구보다도 본인의 역량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자신은 남보다 그저 조금 더 명민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역대 영웅들이 남긴 모든 기록을 참고하여 배는 면밀히 준비하여 배는 신속하게, 배는 신중하게 검은 고성으로 이동했다.
기록상 고성에 들어선 영웅은 없었으나 이 영웅은 사흘을 굶고 헤맨 끝에 이곳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선대 영웅이 남긴 정보도 없었고 도착할 거라 생각지도 않았기에 도착한 후의 계획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구름에 먹힌 달빛은 희미하게 성의 윤곽만을 비추었고, 츠키시마 케이는 깜박깜박 꺼져가는 손전등에 의지하여 거대한 문 앞에 섰다. 문짝을 발로 찰 새도 칼로 베어낼 새도 하물며 노크를 할 새도 없이, 검은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          *          *




   이렇게 검은 고성의 주인과 검은 대지의 영웅은 만났다. 츠키시마 케이는 까만 수트를 말쑥하게 차려 입은 드라큘라 백작, 마왕, 좀비, 그 무엇을 대면하고 미간을 좁혔다. 어쨌든 그가 바로 이 성의 주인이라고, 츠키시마 케이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 성이, 주위의 온 공기가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성의 주인은 무표정했으나 사납지는 않았다. 다짜고짜 마법을 쓰지도 정신을 세뇌하지도 칼을 뽑지도 몬스터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는 손짓 한 번으로 복도의 불을 켜고 눈짓으로 츠키시마 케이를 안으로 초대했다.


   발이 닿을 때마다 복도가 밝아졌다. 아무 무늬 없이 까맣기만 한 바닥 위로 츠키시마 케이보다 한 뼘쯤 작아 보이는 남자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성의 주인은 다 헤진 옷에 먼지와 흙을 뒤집어 쓴 영웅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참을 걸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벽등을 수백 개 혹은 수천 개쯤 지나고서야 두 사람은 광활한 홀에 도착했다. 한편에는 피아노가, 천장 정중앙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그 아래엔 기다란 식탁이 놓여 있었다. 의자는 스스로의 몸을 물려 주인을 자리에 모셨고, 츠키시마 케이는 반쯤은 남자의 단정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반쯤은 휘황찬란한 만찬에 홀려 순순히 그 반대편에 앉았다.


   츠키시마 케이는 본디 음식을 탐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사흘 밤낮을 굶은 배는 끈질기게 만찬을 집어삼켰다. 근처의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서야 츠키시마 케이는 식기를 내려두고 성의 주인을 살폈다. 그는 과일 몇 알과 고기 두세 점을 집어 먹고 일찍부터 포도주만 홀짝이고 있었다.



   “이름이 뭔가요?”



   세로로 길게 찢어진 노란 눈동자가 츠키시마 케이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과연 소문처럼 무정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먼 길을 달려 자신을 죽이러 온 용사에게 마왕의 칼끝 대신 식사용 나이프를 내민 점을 생각하면 그의 성정을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츠키시마 케이입니다. 검은 대지에서 온…… 영웅이죠.”



   이번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성의 주인은 손에 쥔 잔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데에 집중했다. 츠키시마 케이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갈 때마다 그의 강력한, 굳센, 광원한, 아득한, 응집된 힘이 느껴졌다. 검은 대지의 영웅을 죽이는 것은 그에게 날파리 하나 죽이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츠키시마는 느낄 수 있었다. 암담하고 평온했다. 이 지루한 영웅의 짐을 이제는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 한 발자국만 더 걸으면, 그리고 칼을 꺼내면 남자의 목에 닿을 수 있다.


   그때 검은 성의 주인이 일어났다.



   “코즈메…… 켄마, 이 성의 주인이다. 머무를 방을 안내하지.”



   붙잡을 새도 없이 그는 츠키시마 케이로부터 멀어졌고, 배불리 대접받은 영웅은 그렇게 검은 성에 자신의 방을 배정받았다. 드라큘라 백작, 마왕, 불사신, 혹은 그 무엇과 영웅, 전사, 혹은 얼결에 위험으로 내던져진 젊은이의 기묘한 동거의 시작이었다.



                                                                                                                    *          *          *



   츠키시마 케이가 검은 고성 안으로 발을 들였을 때, 바쁘게 일을 하면서도 멀리 모험을 떠난 영웅의 존재를 머리에서 지울 수 없던 검은 대지의 주민들은 얼핏 자신을 부르는 상사의, 동기의, 후배의 목소리를 들었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검은 대지의 사람들은 영웅의 존재를 잊었다.


   츠키시마 케이가 드넓은 홀에 앉아 성대한 만찬을 처음 입에 넣었을 때, 근 일주일 간 받지 못한 영웅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원로원의 귀족들은 불현듯 집에 두고 온 남편이, 부인이, 아이들이, 부모님이 그리워졌고 회의는 신속하게 해체되었다. 그렇게 원로원은 영웅의 존재를 잊었다.


   츠키시마 케이가 성의 주인에게 자신을 소개했을 때, 영웅의 성공을 간절히 응원하며 훈련을 받던 전사들은 문득 모든 일은 잘 풀리고 검은 대지는 영영 평화로우리라는 희망을 느꼈고 칼을 내려두고 각자의 수통을 들었다. 그렇게 한때 영웅과 함께 단련하던 전사들은 영웅의 존재를 잊었다.


   츠키시마 케이가 코즈메 켄마의 이름을 들었을 때, 검은 대지에서 제일 강건하지는 않더라도 최고로 총명한 동생을 믿으며 그의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츠키시마 아키테루는 돌연 잠기운이 밀려와 눈을 감았고 짧은 낮잠을 잤다. 그렇게 영웅의 최고의 아군이자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었던 츠키시마 아키테루는 동생의 존재를 잊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모든 일상이 평범했고, 모든 삶이 평화로웠다. 어느 위대한 영웅은 성으로 향했고 검은 주인을 만났고 모두는 평온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