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ROO TETSURO  X  KOZUME KENMA


W.  늴 리 ( @ H e l l o N u i l l i )

그  해 의  생 일 은  애 플 파 이 만 큼  달 았 다



    “켄마.”
    “응?”
    “솔직히 놀랐지?”


    한 두 발자국 앞서가던 켄마가 힐끗, 쿠로오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게임기로 시선을 돌린다. 이젠 시럽 부분이 꽤 많이 올라온 푸딩 머리가 돌리는 고개에 잘게 흔들렸다.


    “..뭘?”
    “생일파티, 생각도 못 하고 있었잖아.”


    사실 웬만하면 들킬 만도 했는데. 부원들 모두 하나같이 연기에는 젬병이라 팔자에도 없는 생고생을 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첩보요원이라도 된 것 마냥 잔뜩 기합이 들어서 까불더니만 아침 등교에서부터 보충 연습 때까지 하루 종일 켄마 그림자만 보이면 슬슬 피하질 않나, 인사 한번 하려는 데도 잔뜩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으며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라했다.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라 켄마 눈치를 보며 서로 선물은 뭘 준비해왔는지 라던가, 케이크는 누가 가져와야 할 지 라던가 하는 쓸데없는 말들을 하는데 신경이 팔리는 바람에 연습 내내 온통 미스 투성이였다. 결국 참다못한 켄마가 한숨을 푹- 쉬며 오늘 연습 안 할래, 하고 질린 표정을 짓고 나서야 모두들 제 정신을 차리고 연습을 시작했다.

    그렇게 길고 긴 어색한 시간이 지나고 보충연습이 끝나기 전, 그제서야 잔뜩 신이 난 리에프와 야마모토가 케이크를 가져오기 위해 화장실 다녀온다면서 들뜬 표정으로 뛰어나갔다. 저것들은 서프라이즈라는 게 뭔지 이해하고는 있는 걸까, 행여 켄마가 알아챌까 옆에서 말을 걸던 야쿠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리에프가 초에 불을 붙인다고 촐싹맞게 허둥지둥 서두르다 케이크 한 쪽을 찌그러뜨려 야마모토에게 등짝을 얻어맞고 내지른 비명이 문 너머로 들렸을 때에는 다들 정말 망했구나, 싶었다. 눈치 빠른 켄마가 이상한 분위기를 못 알아챘을 리 없지. 쿠로오는 이미 해탈한 표정으로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었다.


    “아닌데.”
    “맞는데.”
    “아닌데.”
    “맞는데.”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못 속이지.”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어설픈 서프라이즈 아닌 서프라이즈 생일파티였다. 뜬금없는 타이밍에 갑자기 체육관 불이 툭 불이 꺼졌고, 얼결에 시작해버려 첫 박이 뭉그러진 생일 축하 노래가 울려퍼졌다. 역시나 켄마는 무심하게 케이크의 촛불을 훅 불어 끄며 알고 있었어, 하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에엑- 켄마의 놀란 표정을 기대하며 눈을 반짝이던 부원들은 다들 맥이 빠진 듯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마워, 하는 그의 말에 금세 텐션을 되찾고 켄마에게 장난을 걸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리에프 손에 들린 케이크를 보고 켄마의 얼굴에 잠깐 동안 놀란 표정이 스친 것은 쿠로오 혼자 눈치 챘을 것이다. 고맙다고 말하는 무뚝뚝한 말투 끝에 묻어나는 웃음기도, 들떠 있던 다른 부원들은 알아채지 못한 듯 했다. 아, 물론 말하기가 무섭게 두 뺨에 잔뜩 묻혀진 생크림에 순식간에 싸그리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말이지.


    “...안 놀랐다니까.”
    “놀랐잖아.”


    쿠로오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켄마가 결국 죽어버린 캐릭터에 짜증을 내며 가던 길을 멈춰서고 쿠로오에게 쏘아붙였다. 쿠로, 말 좀 시키지 마. 성질내는 것도 귀여워, 잔뜩 웃으며 켄마를 놀리는 걸 멈추지 않던 쿠로오가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차에 켄마를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조심해야지. 쿠로오는 잡히지 않으려 바둥거리는 켄마의 후드를 가볍게 잡아채고는 푸딩 머리를 잔뜩 헤집어 놓았다.


    “오늘 같은 날엔 좀 놀란다던지 좋아해도 괜찮아.”
    “아니라니까.”
    “맞잖아.”
    “,,,알았으니까 그만 놀려, 쿠로.”


    헝클어진 머리를 부스스 털어내고 다시 게임을 시작하는 켄마. 뒤를 따라 느릿하게 걷는 쿠로오의 발소리에 맞춰 부원들의 선물이 담긴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기분좋은 잡음은 작게 울리는 게임 소리와 섞여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쿠로오는 켄마의 동그란 뒤통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경쾌하게 귓가를 톡톡 두드렸다. 기분 좋구나, 켄마.

    어쩌면 켄마는 뭔가 있는 것 같다는 눈치는 진즉 알아챘지만 부원들이 다 같이 생일파티를 준비하고 있었을 거라고는 예상 못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쿠로오의 머리를 스쳤다. 하기사 작년까지만 해도 꼰대들 때문에 그렇게나 힘들어 했는데. 아마 켄마는 부원들이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서 축하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랬던 켄마가 이제는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게 되었네, 싶어 내심 기분이 묘했다. 내년에 나 없이 맞게 될 네코마에서의 생일도 이렇게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켄마는 내가 없는 네코마에서 계속 배구를 하려 할까? 이런 부원들과 함께라면 안심이다. 쿠로오는 그렇게 켄마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생각했다.


    “...”


    얼마 쯤 걸었을까, 켄마의 걸음이 별안간 툭 멈췄다. 한참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쿠로오는 갑자기 멈춰선 켄마에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켄마의 시선이 닿은 곳은 디저트 가게의 진열장 속,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애플파이. 아, 이 가게 애플파이 애들이 꽤 괜찮다고 했던 것 같은데.


    “사줄까?”
    “..굳이 안 그래도 돼.”
    “진짜야? 눈은 아니라고 하는 것 같은데.”


    여기서 기다려, 켄마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 했지만 슬쩍 무시한 채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쿠로오의 뒤로 딸랑이는 종소리가 울렸다. 켄마는 의외의 구석에서 서투른 편이다. 먹고 싶은 건 그렇다고 이야기해도 되는데. 몸에 썩 좋진 않으니까 평소엔 많이 못 먹게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생일이니까. 이걸로 주세요. 켄마가 구경하던 먹음직스럽게 생긴 파이를 통째로 달라고 했다. 포장하는 동안 유리 너머의 켄마를 돌아보았다. 그걸 전부 달라고 할 줄은 몰랐는지 큰 홀 파이가 진열장을 빠져나가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 먹어야 해,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했더니 입을 꾹 다물고 무리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쿠로오는 씨익 웃어 보이고는 예쁘게 리본까지 묶여 포장이 된 파이를 챙겨 가게 밖으로 나왔다.


    “자, 이건 네가 들어.” 
    “이렇게 많이는 못 먹어, 쿠로.”
    “두고두고 먹으면 되지. 가자.”


    하루에 한 조각씩만 먹어, 밥 먹기 전에는 먹지 말고. 밥 대신 먹으면 안 돼? 안 돼. 가볍게 투닥거리며 거리를 걷다가 이번에는 쿠로오가 인형 뽑기 기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켄마, 이거 너 닮았다. 눈매가 날카롭게 생긴 커다란 삼색 고양이 인형. 묘하게 비슷한 인상에 쿠로오는 쿡쿡, 웃으며 기계에 동전을 넣었다. 쿠로, 괜히 돈 버리는 거 아니야? 탐탁찮은 표정으로 심란하게 기계 속 고양이와 눈싸움을 하던 켄마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쿠로오를 쳐다보았다. 나 뽑기 잘 해. 걱정 마.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조이스틱을 놀리는 쿠로오의 손이 능숙하게 움직였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저녁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게임기는 이미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 한 손에는 애플파이가 담긴 박스를, 다른 쪽 팔에는 커다란 고양이 인형을 안고 들뜬 템포로 총총 걸어가는 켄마. 쿠로오는 오랜만에 보폭을 넓게 걸어 그의 곁에서 함께 나란히 걸었다. 좋아? 응. 켄마의 목소리에 스민 행복함을 알아챈 쿠로오는 얼굴에 올라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이렇게 알아채기 쉬운데, 이 모습은 나만 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웃어?”
    “그냥, 좋아서.”


    어느덧 둘은 익숙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벌써 도착 했네, 이렇게 가까웠었나. 항상 그랬듯이 쿠로오는 더 가까운 자신의 집을 지나 저 안쪽 골목에 위치한 켄마의 집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집 앞에 마주보고 선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드리워졌다. 새삼스럽게 어색한 공기, 잠시 머뭇거리던 쿠로오가 몸을 조금 앞으로 수그리며 켄마의 어깨를 잡았다.


    “생일 축하해, 켄마.”


    쿠로오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눈을 꼭 감은 켄마. 그 얼굴을 본 쿠로오는 켄마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 맞추며 낮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켄마. 해 져서 추워진다, 얼른 들어가. 켄마는 잡았던 어깨를 놓으며 다시 몸을 일으키는 쿠로오를 꾹 붙잡았다. 응? 머뭇거리는 켄마를 보며 쿠로오가 고개를 갸웃 했다.


    “쿠로,”
    “?”
    “이 애플파이, 혼자 먹기엔 너무 큰데...”
    “...”
    “...먹고 ...갈래?”







W.  돌 규 ( @ d o l k y u 0 0 1 6 2 4 )



  아마 지난밤부터 손이 떨리고 심장이 떨려 잠을 잘 자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눈을 감으면 혹여나 하는 마음에 암울한 미래를 상상했고, 겨우 그렇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을 스스로 다독이면 꼭 닫아둔 눈꺼풀 사이로 핑크빛의 두근거리는 미래가 떠올라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밤을 새우고 황폐한 모습으로 너를 만나러 집 밖을 나섰다.



                                                                                                                                *          *          *



쿠로는 여느 때와 같이 단정하지는 않은 교복을 입은 모습으로, 어울리지 않게 한 손에 조그마한 쇼핑백을 들고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켄마 생일 축하해. 선물은 나야!”


머리 한쪽에 문구점에서나 팔법한 리본을 매단 쿠로는 내게 다가오며 턱에 두 손을 괴고 꽃받침을 만들어 자신이 선물이라며 어필했고, 나는 코앞에 있는 쿠로의 얼굴을 밀어냈다.
누군가가 보면 끔찍할 법도, 혐오할 법도 하지만 매년 한 번씩 거쳐왔던 일이기에 그렇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언제나 처럼 똑같은 쿠로의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다.


“헛소리 말고 선물 줘. 말했던 거.”
“헹? 내가 선물이라니까.”
“쿠로 손으로 안 건네주면 당장 뺏을 거야.”
“그래도 올해는 반품한다는 말 안하네.”
“응. 그러게.”
“여기요. 다른 선물. 18번째 생일 축하해.”


쿠로는 사탕을 빼앗긴 아이 마냥 어딘가 불퉁한 표정으로 내게 쇼핑백을 내밀고는 학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고, 쿠로가 건넨 쇼핑백 속에는 전부터 선물해 달라고 졸랐던, 어제 발매한 새 게임 CD가 들어있었다.


“내가 선물 강탈했어? 표정이 왜그래 쿠로.”
“생일인데 너무 감흥이 없어. 좀 신나서 좋아해 봐.”
“쿠로가 내 생일을 까먹을 일은 없잖아. 그렇게 사달라고 말했는데.”
“맞아. 그거 사느라 3시간을 줄 서 있었어.”
“고마워“
“애정 넘치지? 아이 참. 쿠로오씨가 이렇게 친절해요~.”
“쿠로, 지나친 자신감은 악이야. 선물은 진짜 잘 받을게.”


많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쿠로는 용캐도 내가 좋아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뿌듯하다는 듯한 웃음을 입가에 잔뜩 머금고는 말했다.


“응. 근데 너 그거 다 깨느라고 늦게까지 게임 하면 빼앗을 거야.”
“…안 그래.”
“믿는다?”
“응.”
“영혼 없어.”


눈치가 빨라진 것인지 티가 많이 낫던 건지. 이번에도 귀찮아서 건성 거리는 나를 본 쿠로는 스파이크라도 때리듯 손을 쫙 펴 힘을 가득 싣고는 내 머리를 향해 손을 내리뻗었다.


‘포옥-.’

“뭐 하는 거야.”
“피곤해 보여서… 응원?”
“머리 헝믈어져. 풀기 귀찮아.”
“귀찮으라고 하는 건데. 참, 켄마 너 또 늦게까지 게임했지?”
“아니.”
“그런데 왜 눈 밑이 퀭해?”
“원래 그랬어.”
“아니야.”
“맞아.”
“아니야.”
“맞아.”
“…아니야.”
“맞아.”
“아니라니까.”


쿠로와의 영양가 없고 의미도 없는 대화가 수없이 지나가고, 의미 없는 발걸음들을 열심히 토닥이자 어느덧 우리의 눈앞에는 익숙한 학교가 보였다.
교정에 들어와 잘 가라며 짤막한 인사를 내뱉고는 3학년 건물로 향하던 쿠로가 문득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되돌아와서 교실을 향해 걸어가던 나를 붙잡고 잔소리들을 쏟아냈다.


“알았지? 졸지 말고, 게임도 하지 말고.”
“쿠로보다는 아닐 텐데.”
“…시끄러워. 수업 열심히 들어.”
“쿠로나 열심히 들어. 뒤에서 n 등이 뭐야. 창피하다 진짜.”
“아악! 켄마 그건 비밀이라고 말했는데…!”
“어라~? 쿠로오상 뒤에서 n 등이셨어요? 공부 완전히 못 하시네요!! 푸하핫!!”


등교시간이 겹쳤는지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리에프는 아침 인사도 생략한 채 쿠로오의 충격적인 등수를 가지고 놀리기 바빴고, 그에 따라서 쿠로의 이마에서는 세찬 힘줄들이 하나씩 돋아나기 시작했다.


“쿠로 나 들어갈게. 리에프, 너는 저기 쿠로 이마의 힘줄을 보고 말해.”
“응. 잘 들어가.”
“응. 아, 쿠로 아까 선물 준 거 아직 유효해?”
“무슨 선물? 게임 CD는 선물로 줬으니까 켄마꺼겠지? 그런데 유효기간이 있을 리가….“
“참! 켄마상 생일 축하해요.”
“있지 쿠로, 이따가 오후에…”
“켄마상! 이거 생일선물이에요! 생일 너무 축하해요!!”
“오후에..”
“이거 제가 집에서 직접 포장했어요!”
“학교 끝나고….”
“켄마상 제 선물도 받아주세요. 뒤에서 n 등 하신 분이 드린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울컥. 가슴속 깊은 곳에서 짜증이 올라왔다. 애써 무시하려 노력했지만 말할 타이밍마다 끼어드는 저 눈치도 없는 리에프탓에 말이 뚝뚝 끊겨 몹시도 귀찮았다.


“리에프 그만해. 짜증나. 그리고 쿠로 진짜 화났다..”
“응 맞아. 리에프? 우리는 아침운동을 좀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체육관으로 가자.”
“….헉 잠시만요.. 쿠로상…악! 쿠로상!!!”
“오야? 누가 보면 내가 너 괴롭히는 줄 알겠다. 사랑의 특훈인데. 그렇지?”
“사랑의 특훈 열심히 받을 테니까 이것 좀, 팔 좀 조금만 풀어주시면 안 되나요?”
“애정의 표시야. 잔말 말고 따라와.”


쿠로의 팔과 허리 사이에 머리를 잡힌 채, 허리도 제대로 못 펴고 바동거리는 리에프가 조금은 안쓰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고소했기에 눈길 한번 돌리지 않으려 애쓰며 교실로 향했다.



                                                                                                                                 *          *          *



점심시간,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생일 축하한다며 선물과 함께 먹을 것을 건네주던 배구부원들 덕분에 달아진 입에는 딱히 입맛이 돌지 않았다. 덕분에 배는 간단하게 채우자는 마음으로 매점에서 우유 하나를 사서 들고 교실로 올라와 교실의 문을 연 순간,

‘펑! 퍼벙!’


“켄마!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해 코즈메!”
“축하해 코즈메.”
“켄마의 18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교실에 들어서니 같은 반 친구들이 한데 모여 조그마한 생일파티를 준비해 주었다. 생일을 챙겨달라고 말하기도 모호했고, 딱히 받고 싶은 욕구도 없었기에 굳이 이야기를 안 꺼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조각 케이크 하나와 선물로 애플파이를 준비해준 친구들이 정말로 고마웠다.


“으응.. 고마워.”
“코즈메도 참, 이런 날은 조금 더 신 나 해봐!”
“코즈메한테 너무 큰 걸 바라는 거 아니야?”
“헉 설마 이런 이벤트가 마음에 안 든다거나…?”
“아니. 이벤트는 정말 고마워. 마음에 들고.”
“헤에- 코즈메가 고맙다는데?”
“앗! 코즈메 얼굴 붉어지는 거 봐!”
“안 붉어졌어. 그냥 조금 더운 거야.”
“우리 반에서 제일 추위 잘 타면서.”
“더위도 잘 타.”
“거짓말~:
“…이런 깜짝 파티에는 면역력이 없어서.”


갑자기 받은 생일선물 겸 파티이기에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즐거웠다. 먼저 생일이라는 걸 말하는 타입이 아니라 딱히 챙겨줄 일도, 받을 일도 없었기 때문에.


“면역력이 없어? 아, 귀여워라 코즈메.”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그런데 너 오늘 선물은 많이 받았어? 부원들한테 뭐 받았어? 그 항상 같이 다니는 선배한테는?”
“나보다 선물에 관심이 더 많구나.”
“엑-! 아니 나는 그냥 궁금해서..!”
“장난이야. 토라랑 쇼헤이가 아까 게임 공략집 선물해줬고, 야쿠랑 카이라고 배구부에 선배들 있는데 그분들은 겨울에 쓰라고 털모자, 털장갑, 털목도리 삼종 세트.. 1학년 애들은 이상한 괴생명체 하나랑 나머지 둘이 같이 게임 CD.”
“엥?“
“왜?”
“그 너랑 소꿉친구라는 그분은 아직 안 주셨어?”
“응”
“에엑 아까 같이 등교하던데?”
“아직. 학교 끝나고 받으러 갈 거야.”
“헤에? 의외네.. 원래 선물은 등교하면서 주던데.”
“응. 그러게.”
“아무튼 우리는 밥 먹으러 갈게!”
“응. 이거 파티 고마워.”
“뭘, 친구 생일이니까.”


말을 끝으로 아이들은 교실을 빠져나갔고 텅 빈 교실은 조용해졌다. 친구들이 주고 간 애플파이를 손으로 지분거리며, 차근차근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했다.



                                                                                                                                *          *          *



“켄마!”
“응, 쿠로”


학교가 끝나고, 배구부의 연습이 없는 자유로운 날이기에 조금 일찍 끝난듯한 쿠로는 2학년 건물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 부럽다. 누구 생일은 배구부 휴식일과 똑같이 날짜 잘 맞아서 생일에 부 활동도 안 하고.”
“생일이 부러운 거야, 배구연습 안 하는 게 좋은 거야?”
“둘 다.”
“솔직하네.”


둘다 부럽다며 투덜이던 쿠로는 집 쪽을 향해 걸으며 내게 물어왔다.


“아, 켄마. 오늘 생일기념 외식이야?”
“음, 아니.”
“엥? 무슨 일로? 원래 매일 외식 했잖아.”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누구랑?”
“너.”
“엥? 나?”
“응.”
“자… 잠깐만 켄마. 내가 너랑 약속했었다고?”
“응.”
“나 기억이 안 나… 언제?”
“오늘 아침에.“
“…에?”
“쿠로 선물은 쿠로라며.”
“,,엥?”


내 뜬금없는 이상한 말에 쿠로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혼자 어벙하게 서 있기만 했다.


“쿠로가 아침에 생일선물이 쿠로라고 했지?”
“응.”
“그렇지. 그럼 쿠로는 내꺼지?”
“으…응?”
“응. 그거야.”
“주인님?”
“…에?”
“켄마 주인님?”
“켄마 주인이랑 놀아줘.”
“뭐야. 그냥 놀러 가자고 하면 되는걸. 그렇게 돌려 말한 거야?”
“아니, 쿠로는! 내꺼라니까?”
“예 예. 소유권 주장 인정해 드립니다. 뭐 하고 놀 건데?”


이 덩치 큰 멍청이는 내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는듯했다. 난 모든 용기와 모든 희망을 여기에 쏟았는데.


“쿠로.”

“응”
“쿠로는 내꺼라니까. 좋ㅇ…”


쿠로는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내 입을 틀어막고 어딘가의 구석진 골목길로 끌고 들어왔다.


“쿠로, 숨..”
“아악!!”
“뭐 하는 거야.”


쿠로는 뜬금없이 머리를 쥐어뜯고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고, 나는 문득 겁이 났다. 모두 간밤에 했던, 아까도 정리하며 애써 잊은, 쿠로에게 고백한 이후로의 최악의 순간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다 망했어.”
“…쿠로는 내가 좋아..”
“조용히 좀 해 봐 켄마!”
“….미안.”


울지말자. 생일이니까. 오늘은 기쁜 날이니까.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눈물은 흘리지 말자고 다짐했었는데, 짜증이 묻어난 쿠로의 말 한마디에 살짝, 아주 살짝 코끝이 찡해왔다.


“계획이 왜 이렇게 엉망진창이야.”
“무슨 말이야?”
“오늘 내가 고백하려 했다고.”
”…에?”


이를 악물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쿠로의 한마디는 나를 당황하게 했다.


“너도 고백했는데 내가 못할 이유는 없지.”
“...그러네.”
“아. 원래는 집 앞에서 하려 했는데 지금 해야겠다.”
“응?”


쿠로는 앉아있던 채로 오리걸음을 하고는 내게 다가왔다. 내 신발 앞에 자리를 잡고 나를 올려다보는 쿠로는 어딘가 커다란 재규어를 닮아 주인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켄마. 우리 연애하자.”
“그게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할 말이야?”
“애처로워 보이려고 노력 좀 했는데.”
“응. 애처로워 보이네.”
“대답은?”


대답하라며 재촉 이는 쿠로의 말에 나도 같이 쭈그리고 앉아 대답해주었다.


“좋아”
“음. 고백이 너무 싱거웠나?”
“아니. 이런게 좋아”
“진짜?”
“응.”
“다행이네”
“그러네”
“생일이니까 놀러 가야지. 가자”


쿠로는 손을 잡으며 나를 이끌어 나갔고, 내 입가에선 웃음꽃이 피어났고, 내 가슴 한편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오늘이 가장 행복한 생일이구나.






‌W.  루 린 ( @ r o o r i i n )



"코즈메 켄마의 스물다섯 번 째 생일을 위하여-!"
"위하여!"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중년남자가 술잔을 높이 들고 힘차게 선창을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반사적으로 제 술잔을 들어 똑같이 외쳤다. 술기가 차오른 테이블은 사케 다섯 병과 안주 네 접시가 더 채워지고도 열기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선술집 조명이 강렬한 붉은 기가 새어나와, 창문 밖에서는 '저 테이블에서 축제라도 벌이나?'하며 기웃거리다 제 갈 길을 갔다. 가을색이 짙어가는 밤은 머무는 시간이 짧아져 아직 열 시임에도 온 사방이 어둑어둑해져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켄마상, 인턴 탈출해서 축하드려요."
"그래봤자 미생이야."
"어머, 농담도 과하셔라."


차분한 검은색 단발머리의, 켄마라고 불린 남자가 사케 반 잔을 대강 들이키며 적당히 답해주었다. 옆에 꼭 붙어 앉은 여자가 새로이 건네는 한 잔을 더 넘겼다. 남자의 목구멍 끝에서부터 알딸딸한 기운이 목에서 타고 올라왔다. 볼부터 연한 선홍빛이 퍼져 돌았다. 일개 신입 사원의 생일을 챙겨주는 회사가 있긴 있구나. 남자는 빈 술잔을 휙휙 저으며 쓸데없는 감동을 받아버렸다. 인턴 기간 동안 인사조차 나눠보지 못한 사람들이 테이블을 꿰차고 있었다. 저를 축하해주러 오기 보다는 오랜만의 들뜬 만찬을 즐기러 모인 게 분명했다. 이미 본 목적을 상실한 자리에서 서둘러 벗어나고 싶었다. 안면도 트지 않은 사람들과의 언짢은 어색함이 그득했다.  


"오늘 자리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몸을 도저히 가누지 못할 거 같아 먼저 일어납니다."


간부고 신입이고 만담을 펼치느라 정신이 없어 남자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아무도 남자를 붙잡는 이는 없었다. 민망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바에야 집 가서 맥주캔 이나 한잔 따고 자버리자. 전철역으로 이동하는 발걸음은 다소 가벼웠다. 알싸한 취기가 송골송골 식은땀으로 흘러내렸다. 어젯밤 하루 종일 문을 열어놓고 잔 탓에 살짝 감기가 걸렸나보다. 재미없는 생일날에 감기까지 업혀가다니. 운이 지지리도 없구나 자책하는 발걸음은 숙취에 절어 힘에 겨워했다.

남자는 전철 플랫폼 기둥에 기대 목에 걸린 사원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원증 한가운데는 눈과 입꼬리가 굳은채로 정면을 응시하는 본인의 얼굴이 붙어있었다. '히비키 컴퍼니, 마케팅부 1팀 코즈메 켄마' 굵은 고딕체로 정갈하게 쓰여진 인적사항은 어딘가 낯설었다. 원하던 회사에 입사부터 정식 사원 발탁까지 순탄하게 흘러왔지만 막상 마주한 사회생활은 꽉꽉 막힌 답답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지루한 틈 속에서 외로움이 북받쳐왔다. 나고야로 이사를 가신 부모님도,  최근 들어 라인으로만 연락하고 지내는 네코마 애들도 그리웠다.

 나이가 어느 정도 찼는데 고작 생일 하나로 들뜨다니. 웃겨. 속으로 그리 생각하면서도 막상 진정으로 생일을 같이 보낼 사람이 없어서 서글펐다. 공허한 한숨을 두 어 번 내뱉고 에 힘없이 들어갔다. 등받이에 널부렁 기대어 멍하니 창문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야경을 주시했다. 올해 생일도 편의점 안주와 캔 맥주로 마무리 짓는 패턴으로 마치겠구나. 오늘은 왠지 네코마 애들 중 한 명이라도 만나고 싶은데. 남자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전화번호부를 둘러보다가 한 이름에서 손가락이 번뜩 멈추었다.


'쿠로오 테츠로'


고등학교 졸업식 이후로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춘 사람이다. 남들 앞에 서는걸 싫어하고 친구 사귀는 것이 귀찮고 무서웠던 남자에게 끈질긴 거머리 같은 존재였었다. 쿠로오는 타고난 주장의 기질이 다분해서 꼬꼬마 시절에도 골목대장을 도맡아 곧장 아이들과 잘 어울렸다. 어린 남자는 한 발짝 떨어져서 그 무리를 구경만 하다 집에 돌아가곤 했다. 보통 아이들은 저렇게 놀구나, 눈대중으로 익히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너 아까 우리 노는 거 보고 있던 애 맞지?"


쿠로오가 불쑥 남자의 집에 찾아왔었다. 한참 뛰어놀았던 모양인지 바지 밑단이 흙으로 엉겨붙어있었다.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옷매무새에도 쿠로오는 전혀 개의치 않고 남자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또래 아이가 집까지 찾아온 적은 처음이라 어린 남자는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쿠로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자의 팔을 무턱대고 잡아 이끌었다.


"저는 친구인 쿠로오 테츠로 입니다! 7시까지만 놀이터에서 놀다오겠습니다!"


거실이 떠나가라 씩씩하게 인사를 마친 쿠로오는 재빨리 어디론가 뛰어갔다. 남자는 잡힌 팔을 급하게 빼내려했지만, 쿠로오의 들뜬 표정을 보고는 태클을 걸 수가 없어 군말없이 이끌려갔다. 놀이터에 도착한 쿠로오는 모래바닥을 깔고 앉아 가방에서 얼룩덜룩한 배구공을 꺼냈다.


"배구해 본 적 있어?"


남자가 도리도리 고개를 젓자, 쿠로오는 처음부터 자기가 가르쳐 주겠다고 으쓱해보였다. 남자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조금만 어울려주자는 심보로 공을 건네받았다. 단순한 공 주고받기에서 그칠 줄 알았던 배구는 가로등 불이 켜질 때까지 멈출 줄 몰랐다. 그 후 로 배꼽시계처럼 둘은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놀이터에서 만나 배구를 하곤 했다. 쿠로오는 절대로 남자에게 다른 아이들과 섞여 놀자는 제안을 하지 않았다. 쿠로오는 다른 애들과 어울리다가도 등하교길은 남자와 함께 했다. 하루하루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단짝으로 붙어 다녔다. 알고 보니 쿠로오는 한 학년 선배였다. 남자가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를 꺼내자 쿠로오는 요즘 한 살 차이가 대수냐며, 여기가 미국이었으면 친구 먹고도 남았다는 넉살좋은 농담을 해댔다. 그는 가벼운 농담을 툭툭 내뱉으면서도 무게감 있는 인상을 주었다.

어느 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충동적으로 질척한 관계를 맺어버렸다. 쿠로오 집에서 시험공부를 같이 하다가 지루해져서 술을 마신게 화근이었다. 가볍게 맥주 한 캔씩 나누어 마시다 느슨하게 시선이 오갔다. 쿠로오의 눈길은 남자의 동공부터 콧망울, 입술까지 천천히 내려갔다. 풀린 눈으로 입술을 달싹이다 남자의 코앞까지 몸을 기울였다. 쿠로오는 순식간에 들뜬 표정이 흐트러져서 남자의 입술에 조심히 맞대고 가쁜 숨을 내뱉았다. 남자도 눈을 감고 우정의 선을 넘어버렸다. 쿠로오의 가족 중 한명이라도 들이닥치기라도 한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질게 뻔했다. 아찔한 절정 가운데서도 은밀한 잭팟이 터지는 순간마다 둘 다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땀에 절어 나란히 침대 위에서 기절하면, 쿠로오는 항상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았다.

남자가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쿠로오의 입은 벙긋거리다가 꾹 다물었다. 야릇한 밤 사정을 마친 다음날이면 죽어도 어색해지기 싫어서 의연하게 행동하기 바빴다. 하교길에 넌지시 물어봐도 쿠로오는 바짝 마른 웃음만 토해내며 설렁설렁 넘어갔다. 찰나의 느릿한 쿠로오의 시선이 애석하게 가라앉아 남자의 그림자 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축 처지고 말수가 확연히 준 쿠로오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다가왔다. 학교와 집만 오가는 일상에 차츰 간극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남자가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쿠로오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거나 헛기침을 하며 말을 더듬기 일쑤였다. 문제의 그 날 이후로 남자를 대하는 태도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남자는 한번이라도 붙잡고 물어보려 해도 곧바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자꾸만 피하는 이유가 뭐냐고, 언제까지 본인만 안절부절해야 하냐고 따박따박 따지고 싶었으나 대놓고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쿠로오가 의도적으로 두는 거리를 두는게 맞다면 이런 헛수고는 그만두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쿠로오와 끝까지 친구로 남길 원했다. 무던히 평소처럼 지내려고 애쓴 보람도 없이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바다 위 모래성처럼 파스스 무너져 내렸다. 그의 손을 잡고 차근차근 오르던 오르막도 가파르고 거칠었지만, 그의 손을 놓자마자 걷잡을 수 없이 나락까지 떨어졌다.


[이번 역은 신바시역, 신바시역입니다]


남자는 졸린 눈을 엄지손가락으로 벅벅 짓누르며 전철에서 내렸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인파에 섞여 편의점으로 향하는 몸이 철근을 지고 가는듯 무거웠다. 주류 코너로 가는 동안 남자의 코트 주머니에서 짧고 강한 진동이 울렸다.


[켄마상! 영화보느라 이제 문자를 봤어요! 약속이 있어서 만나는건 무리지만 그래도 생일 엄청 축하해요!]


쿠로오가 아닌 이름에 남자의 눈꼬리가 축 쳐졌다. 미운 정이 들어버린 후배, 리에프에게서 온 축하 문자였다. 씩씩한 목소리가 문자만으로도 생생하게 전해졌다. 기본기도 제대로 못 익히는 애가 에이스가 되겠다며 다짜고짜 배구부에 입부해서 배구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감독님께서 믿고 입부를 허락한 멤버답게 곧 일년만에 큰 키의 장점을 살려 고교 배구부 선수들 사이에서 슈퍼 루키로 승승장구 하게 되었지만, 첫 연습 기간 동안 공도 제대로 못 맞춘걸 떠올리면 절로 한숨이 나왔었다. 무대포로 팔을 휘두르는 바람에 쿠로오에게 된통 혼나기도 많이 혼났었다.

어떤 기억을 끄집어내든 쿠로오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사고회로에 헛웃음이 났다. 차가운 캔 하나를 들어 한쪽 볼에 가져다 대고 복잡한 머리를 식혔다. 남자는 가판대에 이마를 맞대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정신이 바짝 돌아온 남자는 주섬주섬 골라온 먹을거리를 계산대 위에 올려두었다. 알바생은 구부정하게 벽에 기대앉아 영어 원서를 얼굴에 올려놓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얇지만 꽤 어려워 보이는 책과 바닥에 내려둔 대형 백팩, 계산대 옆에 놓인 레포트 묶음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을 쪼개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라 할지라도 대놓고 자는 행위는 명백한 근무태만이었다.


"저기요"
"... ..."


손바닥으로 계산대를 톡톡 두드렸는데도 알바생은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깨워볼까 하던 차에 같은 유니폼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 헐레벌떡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올라간 눈매가 더 사납게 바뀐 여자는 태평하게 자고 있는 알바생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주더니 꽉 쥔 주먹으로 계산대를 크게 내리쳤다.


"테츠로!!! 너 알바실격이야!!!"


알바생 얼굴에 올린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알바생은 껌뻑 놀라 상체를 부르르 떨었다. 하 - 음, 점장니임- 입이 쩍 벌어지도록 하품을 하는 알바생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남자는 그만 안고 있던 먹을거리들을 놓칠 뻔 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여점장이 익숙하게 소리치는 이름, 테츠로. 한동안 부를 수 없던 세 글자, 무심결에 귓속으로 파고든 단어 하나에 남자의 동공이 정처없이 흔들리고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땀이 삐죽삐죽 새어나왔다. 파르르 떨리는 남자의 얇은 입술 사이로 소리 없는 탄성이 나왔다. 알바생은 엉킨 머리를 헤집으며 포스 기계를 만지작거리면서 노곤한 하품을 한 번 더 하였다.


"죄, 죄송합니다...!"


남자는 푹 고개를 숙이고 계산대에 물건을 다 내려놓고는 후다닥 그 자리를 떠버렸다.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이 따가워서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꼭 감은 눈가 사이로 뜨겁고 짠 눈물이 후두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오는 오랫동안 응어리진 슬픔이 남자의 먹먹한 가슴 안을 가득 메웠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몇 분이 지나자 서두르는 발소리와 함께 남자 등 위로 길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손님"
"... ..."
"물건 놔두고 가셨어요."
"... 죄송해요. 안사요."


굵어지고 울림 있는 목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어버렸다. 일을 내팽겨치고 무단으로 외출을 끊은게 분명했다. 조금이라도 걱정되면 자기 일을 멈추고 달려오는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우연히 마주칠거면 훨씬 못생겨져서 눈앞에 나타날 것이지. 정돈한 유니폼이 꽤 잘 어울렸다. 왁스를 떡칠했는데도 또렷한 눈매와 날렵한 몸매는 여전했다. 모던한 차림새에, 느릿느릿하지만 힘 있는 말투. 성인으로 훌쩍 자란 쿠로오는 고등학생의 철부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제법 태가 났다.


"계산은 제가 했어요.'
"... 환불해주세요."
"생일인데 아무것도 못해줘서요. 이거라도 드릴게요."
"... ..."


남자의 청바지 무릎 부분이 눈물로 적셔지고 있었다. 늘 쿠로오에게 받기만 했었다. 우두커니 혼자 다녔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민 것도, 싸워도 아무 말 없이 넘어가준 것도, 졸업식 당일까지 호탕하게 웃으면서 작별인사를 건넨 것도 쿠로오였다. 언제나 남자가 있는 곳에 쿠로오가 따라다녔다. 남자가 닿는 시선에 항상 쿠로오가 서있었다. 낯선 그의 부재는 남자를 끊임없이 좌절시켰다. 시덥지 않은 이야기라도 주절주절 떠들 사람이 없어서 자취방 벽만 바라보기 수일째 였고 밤새 맥주를 까고도 뒷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없어서 포차에서 혼술을 하고나면 짙은 고독감이 밀려왔다. 필요한 순간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우울한 생일날 얼굴을 마주해야하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코즈메."


울음에 가까운 그의 목소리는 매우 절박했다. 그는 남자의 생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안도감에 남자는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막상 쿠로오가 다가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도 모르게 나누었던 밤 사정이 알려질까 무서워 은근히 거리를 두었던 지난날이 재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면 전신거울 앞에 서서 울긋불긋한 쿠로오의 흔적을 짚어내려 가며 새벽의 살내음을 다시 느끼곤 했다. 관계를 가지면서 새어나오던 그의 쉰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한 스스로가 소름끼쳤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도리도리 세차게 저으며 전신 거울을 다시 쳐다보아도 그의 따뜻한 손길과 숨이 잔상에 남았다. 상대방을 밀쳐내지 않던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나 다른 마음을 품게 된걸까? 겨우 몸을 섞었다고 그런 감정이 생길리가 없어. 부정할수록 남자의 입술만 바싹 말라갔다.


"켄마..."
"... ..."
"아스팔트 차가워. 그렇게 앉아있으면 감기 걸려."
"왜... 연락하지 않았어...?"


바스락, 비닐 봉투 소리가 남자의 귓가 옆에서 들렸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드니 옆에 같이 앉은 쿠로오의 옆모습이 보였다. 잘생겼다. 코는 높고 날렵하다. 눈매가 훨씬 날카로워졌는걸. 눈썹은 가지런히 정리해두었네. 남자는 이와중에 쿠로오를 탐색하고 있는 본인이 우스웠다. 무거운 짐을 끌어안고 살아온 지난 대학생활과 인턴 시절을 떠올리면 저 남자를 허무하게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지금껏 자취를 감춘 이유가 무엇인지, 도대체 우리는 어떤 관계로 정의될 수 있는지에 관해, 한참 늦었지만 추궁을 해서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너 만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 ..."
"당장이라도 안아버릴지도 몰라서 도망쳐왔어."
"... ..."
"역겹지?"


담담하지만 이 남자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저 남자가 스스로를 깎아내린 적이 있던가. 단도직입적으로 친구나 다름없는 동생에게 욕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용서받질 못할 고백을 해버린 동료가 가여웠다. 쿠로오가 쥐고 있는 달달 떨리는 비닐봉투 소리에 비통함이 전해졌다. 잠재워두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소용돌이로 덮쳐와 남자의 숨통을 조여왔다. 억눌러왔던 내면의 아우성들이 조각조각 맞춰지고 있었다. 남자는, 산 너머 돌고 돌아온 기차를 타고 종착역에 내려서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보는 심정이 이와 같을까. 인적이 드문 종착역 근처에서 방황만 하던 유랑자가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가는 전철을 타는 순간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과 편안함이 온 몸으로 전해져오는 것처럼, 남자도 쿠로오가 옆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날이 섰던 근육이 풀어져 벌렁벌렁 뛰었던 심장 박동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얼떨결에 고백해린 셈이네. 차여도 앞으로 인사는 받아줘라. 용서는 안해도 돼."


처연하게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고 있는 쿠로오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술 사이에 끼웠다. 남자는 시뻘개진 눈으로 타들어가는 담배 필터만 주시했다. 내 주제 따위로 쿠로오에게 마음의 빚만 안겨주었다는 죄책감에 또다시 남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울지마. 보고 있는 내가 마음이 다 아프다."


북받치는 응어리가 목구멍에서 막혔다. 묻고 싶은 건 산더미같은데 무엇부터 꺼내야할지 몰랐다. 이 아래위가 덜덜 부딪히고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새파래진 입을 틀어막고 묵묵하게 흐느낄 뿐이었다. 쿠로오는 당장이라도 남자의 대답을 듣고 싶어 애가 탔다.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 천천히 남자의 어깨를 끌어다가 어정쩡한 자세로 안았다. 남자의 코로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향수 냄새가 들어왔다. 남자는 왠지 불쾌했다. 쿠로오도 마찬가지였다. 이 남자가 뿌리 염색을 하고 말끔한 짧은 머리로 바꾼게 낯설었다. 예전의 사이로 돌아갈 수 없다는 체념마저 들었다. 남자는 마음이 가는대로 쿠로오의 까슬까슬한 턱에 머리를 부비며 저도 모르게 본심을 말해버렸다.


"이 향수 냄새 싫어... ."
"바꿀까?"
"응..."


쿠로오는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으며 남자를 가슴팍에 폭 묻었다. 부끄러운 남자는 길 한복판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그의 가슴팍에 내키지 않는 주먹질을 했지만 숨이 막힐 지경까지 끌어안은 쿠로오를 말릴 순 없었다.


"너 그런 대답하면 나 기대하게 돼. 희망고문은 하지마."
"진심이야."
"켄마?"
"너랑 같은 마음일지도 모르겠어."


동공이 커질대로 커진 쿠로오는 품에서 남자를 슬쩍 때어놓고 한 쪽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초조해하는 손가락 사이로 눈물 몇 가닥이 흘러내렸다. 켄마는 주위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쿠로오의 뒷목을 잡고 저에게로 끌어당겼다. 쿠로오가 진정할 때까지 들썩이는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테츠로, 일 마치면 맥주 마시러 갈까."
"히-끅 주위 술집 다 문 닫을텐데."
"아니면 내 자취방으로 가자."
"보고 싶었어."
"나도."


둘은 한참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서로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다, 저린 다리를 부여잡고 서로 부축하며 일어날 시점에서 한번 더 와하하-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편의점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서 열을 내고 있었다. 쿠로오의 한쪽 손에는 켄마가 두고 간 비닐봉투가 들려있었고, 다른 한 쪽 손은 연인이 된 사람의 작은 손을 살포시 잡고 있었다. 손에 땀이 많은 편이라 자꾸만 잡힌 손을 빼려고 안간힘을 쓰는 남자가 심술 나 쿠로오는 아예 확 세게 쥐고 유니폼 바지 주머니에 쏙 집어넣어버렸다. 남자도 은근 싫지는 않은지 잠자코 길을 걸어갔다. 좁은 주머니 안에서 열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키스하고 싶어."
"안돼."
"아무도 없어."
"뽀뽀라도 해주면 일 열심히 할 거 같은데~"
"다 마치면 해줄게."
"약속해"


고작 스킨쉽 하나에 신나서 긴 팔다리를 휘적이는 쿠로오가 귀여워보였다. 연애하면 콩깍지가 씌인다더니. 능글거리는 애인을 잘 구슬리는 법부터 알아가야 했다. 애인이 불쑥 휴대폰을 내밀어 놀래키는 것도 익숙해져야했다.


"번호."


남자는 꾹꾹 실수하지 않게 자판을 눌러주었다. 다 치기가 무섭게 휴대폰을 도로 가져간 쿠로오는 탄성을 지르며 편의점 문 앞에 섰다. 이대로 탈주하고 싶다며 징징거리는 쿠로오를 남자가 어르고 달래며 5분동안 응석을 받아주고 나서야, 쿠로오는 입이 삐죽 나온 채로 돌아갔다. 두 시간 정도 기다리는 동안 하던 게임을 끝내려고 남자가 휴대폰을 꺼내보니 가슴을 간질이는 문자 한 통이 와있었다.  


[한눈팔지 말것. 카운터에서 보고 있음. -애인님-]


소유욕이 대단하셔. 정말로 카운터에서 남자를 흘끗 보고 있는 쿠로오가 왠지 모르게 사랑스러웠다. 남자는 간이 테이블에 휴대폰을 올려두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식 자리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잔뜩 끼여 있던 먹구름은 다 숨어버리고 오롯이 달빛과 그 주위의 소수의 별들이 어둠을 밝혀주고 있었다. 개운하고 여유롭게 둘러보는 이 순간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남자는 바로 오늘이 생애 최고의 생일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W.  멀 티 [ x ] ( @ r h q g k r l w j s a n s )

 W h a t   A   C o l o r f u l   D a y

* 컬러버스au (설정 변경 있음)
* “세상의 모든 마법을 너에게” 김이환, < 양말 줍는 소년 >에서 인용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흑백의 세상에서부터 시작한다. 태어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것, 무無에서 비롯한 순수함의 흰 색과 전全에서 비롯한 모든 것의 검은색. 인간은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다 갖춘 모순의 존재로 태어나 감정을 자각하면서 색色을 볼 수 있게 된다.

 희로애락 같은 표면적이고 1차적인 감정은 색을 보는 데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주 섬세하고 깊으면서 복잡한, 그러면서도 자각의 순간 깔끔해지는 그 무언가가 흑백의 세상에 색을 심어 주었다. 대부분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전체 색의 절반 정도를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은? 그 해답은 운명의 상대가 쥐고 있었다. 하지만 색이라는 것은 짓궂게도 쉽게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고 마법처럼 모든 색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상대와의 관계에서 한층 더 날카롭고 깊게, 더 까다롭고 예민하게, 그리고 더 명확하게 감정을 깨닫고 정의를 내려야 본 모습을 내주었다.

 이렇게 복잡 미묘한 것들이라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꼭 그 절반을 다 보는 것도 아니었다. 타고난 성격이나 성향에 따라 어떤 감정을 경험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자각 하지 못해서 그 감정과 관련된 색을 못 보고 사는 경우도 있었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며 냉철한 사람들은 보라색 계열을 보지 못하거나, 아주 흐릿한 혹은 검정에 가까운 보랏빛만을 볼 수 있었다. 반대로 공상에서 오는 기쁨과 환상을 아는 이들은 보라색 계열을 폭 넓게 구분 했다. 조용하고 내향적인, 특히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볼 수 있는 색이 더 적었다. 그리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색을 많이 보지 못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도쿄 어디에 사는 고등학생 코즈메 켄마도 딱히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다.



 많은 색이 보이지 않아도 신작 게임은 재밌었고, 늘 가는 베이커리의 애플파이는 맛있었다. 소꿉친구 쿠로오와 함께하는 배구도 마찬가지였다. 흑백의 시야에 알록달록한 것들이 채워진다 해서 로드워크가 덜 힘들어진다거나, 특훈 후에 열 감기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색을 구분하지 못해 불편한 것도, 아쉬운 것도 없었지만 켄마가 유달리 궁금해 하는 색이 하나 있었다. 쿠로오의 눈동자, 저 다정한 눈이 품고 있는 색은 무슨 빛일까. 한번 쯤 물어볼 만도 했으나 켄마는 그저 맑은 회색으로 보이는 동그란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켄마가 또래보다 느린 편이었다면, 쿠로오는 켄마에 비해, 아니 또래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색을 보고 더 세세하게 구분 할 줄 알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교과서와 함께 받았던 색상 표는 쿠로오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무렵 절반 가까이 구분하게 되어 한동안 학교가 시끌시끌했었다. 감정표현에 있어 솔직하고 그 자각이 빠르다고 쳐도 빠른 성장이라 벌써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 아니냐는 로맨틱한 소문이 떠돌기도 했었다. 짓궂게 물어오는 친구들의 말에도 쿠로오는 그저 웃어넘길 뿐이었다.

 쿠로오는 자신이 주목받건 말건, 항상 붙어 다녀서 은근한 비교의 대상이 되던 켄마를 신경 쓰는 일에 더 집중했다. 물론 눈치 빠른 켄마는 쿠로오가 볼 수 있는 색이 많아질수록 이전보다 더 자신을 각별하게 챙긴다던지, 관심을 쏟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아무 생각 없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켄마가 이 만큼의 색을 볼 수 있는 건 쿠로오의 노력이 컸다고 할 수 있었다. 조급하게 다그치며 끌어 내지 않고 천천히, 켄마가 받아들일 수 있게끔 서서히, 쉽게 지치는 켄마가 나가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절하며 옆에서 도와준 사람이 쿠로오였으니깐. 혼자서 얻을 수 있는 감정은 얼마 되지 않았고, 보통 그 감정들이 주는 색이라고 해봤자 조금 옅어진 검정에 다른 빛이 새어 들어간 것들이었다. 켄마가 좀 더 많은 색을 보길 바랐던 것은 쿠로오의 욕심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었지만 켄마는 쿠로오가 내민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          *          *



 켄마가 170개의 노란색 색상 표에서 40개의 노란빛을 구분 하게 된 시기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쿠로오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던 봄이었다. 분명 저와 같은 겨울을 났는데 어째서 쿠로오만 키가 쑥 컸는지, 켄마는 조금 더 고개를 들어 교복을 갖춰 입은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한 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던 고만고만한 꼬맹이에서 쿠로오만 어른이 된 것처럼 보였다.  

 운동장에 줄을 서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쿠로오만 쳐다보던 켄마는 자신의 초등학교 입학식 날을 떠올렸다. 담임선생님이 나눠준 색상 표는 온통 검정과 흰색, 그리고 그 어느 즈음의 회색들로 가득 차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좀 더 다양해졌지만 여전히 또래에 비해 느리다는 것을, 그리고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어도 쿠로오를 약간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켄마는 알고 있었다.
    


“좋겠다…….”  



 켄마는 건조한 느낌에 눈을 꾸욱 감았다. 본인은 볼 수 없는 밝은 황금색 눈동자가 빛을 다시 보았을 때, 새로운 색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을 감기 이전보다 더 밝고 선명하게 보이는 운동장의 나뭇가지, 연한 회색으로 보였던 A군의 머리색, 그 옆에 서있는 남자아이의 가방까지. 켄마는 익숙하지 않은 느낌에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 주머니 속에서 단어장처럼 묶여있는  색상 표를 꺼내 펼쳤다. Y(yellow)섹션에서 켄마가 구분 할 수 있게 된 것들은 거의 갈색에 가까운 #8B4513, #8B4F1D  같이 탁하고 어두운 노란색들이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참 복잡 미묘하면서 단순했다. 다친 줄도 모르고 있던 상처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따갑고 신경 쓰이는 것처럼. 한번 알게 된 감정은 순식간에 그 크기를 키워나갔고, 켄마의 맘속 깊은 곳까지 건들이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아주 작고 사소한 부러움에서 시작한 것은 나이와 함께 자라나 샛노란 ‘질투’라는 것을 불러왔다. 켄마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때였다.

 수업이 끝나고 부 활동을 가던 도중에 생긴 일은 켄마의 속에서 잔잔하게 일렁이던 무언가에 불을 붙였다.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의 마지막을 밟았을 때, 반 계단 위쪽에서 쿠로오를 부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꽤나 긴장한 표정과 눈빛, 등 뒤로 숨긴 손에 쥐어져 있는 직사각형의 종이. 누가 봐도 다 알 수 있는 풋풋한 고백의 타이밍이었다. 쿠로오를 불러 세운 여학생은 말끝을 흐리며 켄마를 쳐다보았고, 쿠로오는 켄마의 어깨를 토닥였다.


“딴 길로 새지 말고, 먼저 가 있어. 금방 갈게.”
“....응.”


 혼자 부실에 도착한 켄마에게 다들 쿠로오의 행방을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몰라.”였다. 괜히 심사가 뒤틀린 기분이었다. 언제나 똑같던 일상에 등장한 낯선 사람, 그리고 저를 혼자 보낸 낯선 쿠로오. 켄마는 머릿속을 오고가는 생각들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게임기를 잡았다. 쿠로오가 부실에 도착했을 때는 켄마가 세 번째 판을 막 클리어 하던 참이었다. 뭐하느라 이제 오냐는 야쿠의 말에 좀 전의 일을 간단히 얘기하는 쿠로오의 주위가 시끌시끌해졌다. 몇 반의 누구냐, 뭐라고 그랬냐, 받아 주었냐 등 질문이 쏟아졌다. 여러 명의 소리가 뒤섞여 있는 와중에도 ‘거절했다.’ 라는 쿠로오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켄마는 아무 관심 없는 척 앉아서 게임기만 붙잡고 있었지만, 쿠로오가 부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화면엔 GAME OVER가 깜박이고 있었다.

 평소보다 실수가 많았던 부활동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쿠로오가 넌지시 물었다.


“켄마는 안 궁금해?”
“뭐가…….”
“이 쿠로오씨가 다른 반 여학생에게 고백 받은 거에 대해서?”
“....별로.”

 
 쿠로오는 켄마의 입이 미세하게 비죽이는 것을 알아챘다. 귀엽기는. 쿠로오는 두 걸음 정도 앞서 나가는 켄마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머리를 헝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쿠로오씨는 켄마 밖에 없답니다? ”
“딱히....걱정 같은 거…….”


 거짓말은 아니었다.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신경은 쓰이는, 낯선 타인에 대한 작은 경계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켄마를 건드는 사람은 쿠로오였다. 자신밖에 없다고 하는 가벼운 말투는 꽤 무겁게 켄마의 마음을 짓눌렀다.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옆에 있던 존재가 새롭게 느껴진다는 것은 조금 어지럽고 간지러웠다.

 저 날 이후, 켄마는 남모르는 속앓이를 했다. 늘 자신의 뒤에서 느리게 따라오는 쿠로오가 갑자기 신경 쓰여 나란히 걸었는데,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팔이 마음까지 아슬아슬하게 만들었다. 결국 켄마가 쿠로오를 두 걸음 앞세워 걷게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뒤로 보내버렸다. 아마 붉게 달아오른 귓바퀴를 쿠로오도 봤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하나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서 더 그랬다. 그래도 그 시간을 줄이고 싶진 않았다. 쿠로오 옆에 다른 사람을 세워두고 싶지 않았다. 요 며칠 자신을 감싸고 있는 기묘한 독점욕,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간지러운 질투, 그리고 이런 혼란스런 마음이 반영되는 어지러운 시야. 자꾸만 흐릿하게 제 빛을 뽐냈다가 은연중에 회색빛으로 돌아가는 것들에 잔뜩 예민해진 켄마는 찌릿한 편두통을 느끼며 양호실로 향했다.

 1층 끝에 있는 양호실로 내려가면서 3학년 층 복도를 무심결에 쳐다본 켄마는 창가에 기대서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쿠로오를 발견했다. 활발하고 다정한 제 소꿉친구를 한참동안 멍하니 보다가 이쪽의 시선을 본 친구 한명이 쿠로오를 툭툭 쳤다. 쟤 코즈메 아니야? 쿠로오가 고개를 돌렸고, 켄마는 마주친 시선에 화드득 놀라 계단을 서둘러 내려갔다. 뒤에서 쿠로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켄마는 무시하고 점점 더 아파오는 머리를 짚으며 양호실로 향했다. 약을 받아먹고 제일 구석 침대에 누우면서 켄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이젠 자기 자신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인정해야 했다.  
   

그래, 질투하고 있다. 내가 아닌 누군가 쿠로 옆에 있는 것이 싫다.


 며칠 동안 켄마의 속을 헤집었던 독점욕이 버무려진 질투심은 그간의 마음고생에 대한 보답으로 햇살 같은 노란 빛을 내주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 양호실을 나왔을 때는 눈치 채지 못했었다. 약간 몽롱한 정신을 깨우려 화장실에서 물만 대충 묻힌 세수를 하고 거울을 마주했을 때야 비로소 켄마는 제게 또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난생 처음 보는 자신의 눈동자 색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쿠로는 내 눈동자 색을 볼 수 있을까....? 눈알을 도로록 굴려보며 신기함을 만끽한 켄마는 쉬는 시간이 되기 전 교실로 돌아갔다. 보이는 색이 급격하게 많아져서 인지 영 맥을 못 추던 켄마는 결국 그 날 부활에서 벤치 신세를 졌다.

 부실에서 쿠로오를 기다리면서 웅크리고 앉아 게임기를 두드리던 켄마는 제일 먼저 들어온 야마모토에게 충격적인 소리를 들은 날도 같은 날이었다. 시야를 가리기 위해 기른 머리가 공포영화의 주인공 같다며 너무 눈에 띈다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어지러운 머리를 쾅 치는 느낌에 표정이 구겨졌다. 쿠로오는 당장 미용실에 가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켄마를 달래 집에 데려다 주었다. 어차피 내일이 휴일이니 오늘은 쉬라며 집 앞까지 바래다준 쿠로오에게 인사를 하고 집에 들어가려던 켄마가 다시 몸을 돌렸다.


“쿠로.”
“오야?”
“쿠로는...내 눈동자 색, 보여?”


 오늘따라 이상하네. 켄마. 복도에서 도망치질 않나... 평소 신경도 안 쓰던 ‘색’ 이야기를 먼저 꺼내다니. 쿠로오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켄마는 대답이 돌아오기 전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보이지. 누구 눈동자 색인데-”


 쿠로오가 능글맞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왔다. 제 눈높이에 맞춰서 멈춘 쿠로오가 자신의 눈을 진득하게 쳐다보는 바람에 켄마는 고장이라도 난 듯 굳은 채로 멍하니 그 눈만 바라봤다. 길게 느껴졌던 짧은 눈 맞춤은 켄마의 머리를 헝클이고 ‘간다!’라는 인사를 남긴 쿠로오의 말로 끝났다. 붉어진 얼굴을 수습 할 수가 없었다.

 눈에 띈다는 말이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켄마는 바로 다음날 금발로 염색을 했다. 두시간정도의 지루한 시간이 끝났고, 검정색 머리는 노란 황금빛으로 완전히 뒤덮였다. 이쯤이면 쿠로오가 개인 운동을 끝내고 집에 왔을 시간이라 켄마는 쿠로오네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쿠로오의 엄마였다. 테츠로는 씻고 있으니 방에 가서 기다리라며 사과 한 접시를 깎아 내밀었고, 꾸벅 인사를 한 켄마는 두 손으로 받아들고 익숙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과를 깎는 내내 머리색이 예쁘다는 칭찬을 한 바가지 들은 켄마는 쿠로오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며 방으로 들어오던 쿠로오는 켄마의 노란 머리통을 보고 멈칫했다. 노란 고양이가 침대에 앉아있는 것 같아 웃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오호...켄마 그거 무슨 색인지 알고 한거야?”
“응.”


 이번엔 쿠로오가 고장 난 듯 했다. 응이라고? 이 색이 무슨 색인지 보인다고? 쿠로오는 책상 어디쯤에 나뒹굴던 색상 표를 들고 켄마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이거, 이 색도 구분 돼?”
“응.”
“그럼 이거는? 이것도?”


 쿠로가 가리킨 색은 원색의 노란색이었다. 운명의 상대에게서 받을 수 있는 나머지 절반의 색 중 가장 중심의 색, 원색. 켄마가 이것도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은 운명의 상대에게 질투를 느꼈다는 소리였다. 쿠로오는 기대 반 불안 반으로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켄마의 대답을 기다렸다.


“…….응, 보여.”    
 


 꼬치꼬치 캐묻는 쿠로오가 귀찮다는 내색도 없이 켄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쿠로오는 잔뜩 흥분해서 질문을 퍼 부었다. 언제부터 보였어? 상대가 누구야? 정말 여기 이게 다 보여? 내 눈 색은? 아니, 아니지 네가 먼저지. 네 눈동자 색도 봤어? 마구 쏟아지는 질문에 켄마는 살짝 찌푸린 눈으로 쿠로오를 흘겼지만, 대답을 회피하지 않았다.


“다 보여. 이틀 전부터.”
“그럼...누군데...?”


 쿠로오는 긴장이라도 한 듯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켄마는 쿠로오의 얼굴을 보고 말할까 망설였다. 네가 고백 받는 걸 보고 질투 했다고 제 입으로 말하는 건 역시 부끄러웠다. 켄마는 포크에 찍어진 사과를 베어 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시선은 여전히 발끝에 머물렀다.


“....쿠로. 쿠로가 고백 받았을 때.”


 쳐다보지 않아도 쿠로오의 표정을 알 것 같았다. 호선을 그리는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켄마는 손에 쥔 포크만 만지작거리며 말을 아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켄마의 운명의 상대가 쿠로오라는 걸 확인했으니, 이번엔 이쪽이었다. 쿠로오가 켄마의 금발을 쓰다듬었다.


“예쁘다. 염색 잘됐네.”
“아...어. 고마워.”
“네 눈동자 색이랑 잘 어울려.”


 잔잔하고 달달한 고백의 말은 쿠로오에게서 나왔다. 오래 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고. 운명의 상대라는 것과 상관없이, 켄마 네가 좋다고. 쿠로오의 말은 연한 분홍빛을 살랑이며 켄마의 마음 한 곳으로 내려앉았다. 쿠로오의 볼도, 켄마의 귀도, 맞닿은 손가락의 마디마디가 온통 분홍빛이었다.
 


                                                                                                                                *          *          *



“그때 너 진짜 귀여웠는데.”
“뭐라는 거야....옷이나 입어.”

 
 둘 다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동거를 시작했고, 각자 자기 운명의 상대에게 색을 심어주느라 바빴다. 타고나길 빨랐던 쿠로오는 늘 그렇듯 조금 느린 켄마를 기다리고, 받쳐주고, 끌어당겼다. 주말 오후의 데이트는 간만이었다. 만족할 만큼 늦잠을 잤고, 안 먹겠다는 켄마를 식탁 의자에 끌어다 앉혀 간단한 식사도 끝냈다. 햇빛은 따사로웠지만 바람이 아직 차기에 적당한 두께의 겉옷을 골랐다. 옷을 고를 때나,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을 때, 저녁 준비를 할 때, 같이 산책을 할 때, 거의 매 순간 쿠로오는 켄마에게 자신이 지켜본 켄마를 말해 주었다. 오늘 계란 노른자를 보고 노란색 얘기에 꽂혔는지 아까부터 그 즈음을 얘기하고 있었다.

 여전히 금발과 푸딩머리를 오가고 있는 켄마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이마에 입 맞추었다.


“예쁘다.”
“쿠로...옷 입으라니깐....”

   
 이번엔 콧날을 부비며 눈을 마주한다. 가까워진 입술 위로 숨결이 느껴졌다.


“눈도 예뻐.”
“나도 알아....그니깐 얼른 나갈 준비 해.”


 어째 가면 갈수록 능글맞아지는 쿠로오를 쳐다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랜만의 외출은 폭신폭신했다. 더운 것도, 추운 것도 싫은 켄마에게 딱 알맞은 날씨였고, 새로 오픈한 파이 전문점의 애플파이가 꽤나 맛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먹는 켄마를 보고 쿠로오는 추가 주문으로 한 박스를 포장 했다. 안 보이던 색이 하루에도 몇 가지씩 보이면서 도저히 입을 수 없는 옷들을 얼마 전에 싹 정리해버려 반이나 비어 버린 옷장을 채우기 위해 나선 쇼핑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저녁식사로 따끈한 나베를 먹고 집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을 사왔다. 켄마의 애플파이만 냉장고 안에 잘 정리한 뒤, 나머지 짐은 대충 내려놓았다. 쿠로오는 소파에 늘어지게 누운 켄마에게 맥주를 따서 건네고 그 옆에 풀썩 앉았다.

 TV에서는 하루 종일 마법사 영화 시리즈를 방영해 주고 있었다. 6편의 2부가 막 시작하는 부분이었다. 어릴 때 봤던 영화를 성인이 되고 보면 새로 나온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마치 본인의 세상처럼, 흑백으로 보이던 것들이 색을 입고 있다는 건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기분을 안겨 주었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켄마는 화면 안에서 지팡이를 휘두르고 주문을 외는 것에 꽤나 집중했다.
   

“쿠로...”
“응?”
“색이 보인다는 건....마법 같아.”

 
 술기운에 노곤해진 켄마가 느릿하게 말했다. 정면을 향하던 시선이 쿠로오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저와 비슷한 색의 눈동자가 고개를 돌린 자리에 이미 와있었다. 쿠로오가 언제부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 마법 같지.”


 쿠로오가 점점 가까워졌다. 옅은 맥주 향이 났다. 가까워지는 쿠로오의 입술이 좀 더 붉어진 것 같았다. 어쩌면 제 마음의 색이 옮아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켄마는 물러나지 않았다. 쿠로오의 목에 팔을 두르고 길고 진한 입맞춤에 답했다. 아쉬움을 잔뜩 담은 입술이 켄마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어 당겼다가 놓았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입술 사이의 공백에서 쿠로오가 속삭였다. 켄마, 그게 마법이라면-



“세상의 모든 마법을 너에게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