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ROO TETSURO  X  KOZUME KENMA


‌W.  쿠 잉 ( @ M e l l i f l u o u s _ d a y )

‌위 저 드  베 이 커 리



0.

  코즈메의 가게가 위저드 베이커리라 불린 건 순전히 입소문에서 시작된 조롱에 가까운 뜻이었다. 위치가 나쁘다. 구석진 곳의 존재감이 크지도 않은 크지 않은 베이커리였다. 주인은 뿌리가 내려온 금발이 꼭 푸딩과 닮은 달콤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였다. 한눈에 봐도 무뚝뚝한 표정의 파티시에 복장을 갖춰 입은 남자가 손등으로 안경을 올리며 꾸벅 인사를 건넨다.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롤리팝이 들려 있었다. 그 롤리팝을 계산대 앞에 꽂아 넣은 코즈메가 멍하니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새카만 남학생에게 의식적으로 물었다.


  “찾는 거라도?”


  새카만 남학생, 쿠로오의 손에 하나가 남은 쿠키 봉지가 들려 있었다. 코즈메의 눈동자가 안경 너머로 바쁘게 움직이더니 남학생 앞으로 다가온다. 오른쪽 눈을 찡긋거리던 코즈메가 쿠로오의 얼굴을 훑고 뒤이어 손에 들린 쿠키에게로 눈을 향했다.


  “사러 온 얼굴이 아니네. [별빛 아이싱 쿠키]. 사 갔던 사람 중에 네 얼굴은 없었는데. 누구한테 받아서 온 거야?”


  별빛 아이싱 쿠키. 언뜻 보기엔 평범한 아이싱과 진저쿠키로 보이는 것이 판매대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벼운 설명이 있어야 할 자리엔 [호감도 상승. 단, 이미 호감이 없는 상대에겐 사용해도 소용없음]이란 설명이 적혀 있다. 코즈메의 베이커리가 위저드 베이커리라고 불리는 이유다. 설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슬픔을 완화시켜주는 효능, 기쁨 상승 작용, 진정해야 하는 순간에 먹어보세요 등등 마법 같은 이야기들만 잔뜩 있는 탓이었다. 제품의 이름도 하나같이 수상했다. 별빛 아이싱 쿠키, 달빛가루 묘약, 애플파이 골든 피스, 오로라 롤 케이크 등 맛을 예상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눈짓으로 그것들을 한 번 훑고 마른 침을 꿀꺽 삼켜버린 쿠로오가 손에 쥐고 있던 진저 쿠키를 코즈메에게 건넸다.


  “이, 이거 정말로 효과 있는 거예요?”


  자기 발로 찾아오고도 당황한 표정과 몸짓. 어색한 말투. 코즈메는 손목 안쪽으로 채워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방과 후. 근처의 고등학생들이 방문할 시간이다. 코즈메의 손이 쿠로오를 지나 문에 걸린 OPEN 표시를 BREAK TIME으로 돌려두었다. 변덕 심한 사장님의 영업시간 정도는 수긍하고 기다릴 학생들의 얼굴이 보일까 작은 커튼도 쳐 둔 코즈메가 다시 무뚝뚝한 얼굴로 쿠로오를 마주했다.


  “응. 난 마법사니까. 뭐 불만 있어서 찾아왔어? 미안하지만 난 컴플레인은 안 받아.”




1.

  쿠로오가 쿠키를 받은 건 한 여학생에게서였다. 흔한 클리셰로 같은 반 친구들의 야유를 받으며 나간 교실 밖에선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처음 보는 여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학생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속이 뻔한 말과 함께 문제의 쿠키를 건네주더란다. 뭣도 모르고 그 쿠키를 그 자리에서 꿀꺽 삼킨 쿠로오에 비해 남은 쿠키 하나를 들고 ‘위저드 베이커리’의 쿠키라며 손가락질을 하던 친구들을 잊지 못한다.

  소문이 넓게 퍼진 건 아니었다. 약간은 오컬트적인 이야기로 존재했고, 실제로 위저드 베이커리의 간식을 먹고 고백에 성공했다거나 반대로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려왔을 뿐이었다. 모든 오컬트가 그렇듯 부풀어진 소문은 질이 나빴다. 효과가 좋다던 불행해지는 묘약에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 나오거나 기분이 나빠지는 쿠키를 먹었다가 칼부림을 냈다는 소문도 있었다. 물론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으나 그 소문의 근원지에서 사 왔다는 쿠키를 하나 꿀꺽 삼켜버린 쿠로오가 사색이 된 얼굴로 위저드 베이커리에 대한 소문을 꿀떡꿀떡 흡수했다.


  “야야,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걸 팔겠냐.”
  “그런 소문이 돈다, 이거지. 걱정되면 한번 그 베이커리에 가서 살펴보던가. 네가 먹은 그 쿠키가 무슨 쿠키인지.”



‌                                                                                                                                *          *          *



  그 말에 홀린 듯이 베이커리로 찾아온 게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젊은 사장의 얼굴에, 생각보다 번듯한 가게에 할 말을 잃은 쿠로오가 코즈메의 냉소적인 웃음에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방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더라. 마법사?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원초적인 단어였지만 아릿하도록 시린 비웃음에 차마 얼어붙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쿠로오는 천천히 코즈메를 뜯어보기로 했다. 푸딩머리, 사나운 눈매, 뿔테 안경, 묶은 머리. 파티시에 복장. 그리고 자신의 퇴로를 막은 한쪽 팔. 완전히 벽치기를 당하고 있는 자신의 어정쩡한 자세에 쿠로오가 겨우 마른 침을 삼키고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 요즘 학교에 소문이 좀 돌고 있어서 말이죠. 이게 어떤 쿠키인가 궁금해서 와봤어요.”
 “그래?”


 컴플레인을 걸 생각까지 하고 온 사람치곤 말이 평범했다. 제법 긴 머리칼을 가진 코즈메가 꽁지머리를 풀어 다시 묶기 시작한다. 곰곰이 무언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별빛 아이싱 쿠키]. 효과는 상대방에게 기분 좋은 호감도 상승. 단, 처음 보는 사람이거나 이미 호감도가 하락한 사람에겐 효과 없음. 인데, 어제 그걸 사간 애가 아마 머리가 긴 여자애였지?”
 “…그걸 어떻게 기억하세요?”
 “난 원래 다 알아.”
 “그게 뭐예요.”
 “마법사니까.”


 말끔하게 머리를 묶은 코즈메가 앞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실핀을 꺼내 들었다. 그것으로 흘러내린 한쪽 옆머리를 고정시키더니 단정한 얼굴로 싸늘한 냉기를 품었다. 쿠로오는 그 모습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연상에게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아니라 어딘가 손이 많이 가는 서툰 사람의 반사적인 경계선이라고 왠지 결론지어 내렸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괜히 자신을 막고 서 있는 남자를 피해 무시무시한 소문의 스위츠를 둘러보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먹었던 진저 쿠키엔 정말로 [별빛 아이싱 쿠키] 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치즈 헤어볼] 이라는 빵은 치즈가 잔뜩 들어가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전시된 케이크 중에선 애플파이 골든 피스가 황금색 이름표를 달고 시럽으로 반짝거리는 조명을 한 몸에 받는다. 가게 전체가 묘한 이름을 가진 스위츠들 뿐이었다. 쿠로오가 어색하게 별빛 아이싱 쿠키를 가리켰다.


 “이거 인기 좋아요?”
 “고백하려는 애들한테 좋겠지. 사용도는 자기들 마음이지만. 그래서, 무슨 불만을 뱉으려고 왔어, 쿠로오 테츠로군?”
 “아…….”


 목구멍 너머로 뜨거운 탄식이 넘어왔다. 뒤끝이 긴 사람을 건드린 모양이다. 하하, 어색한 웃음을 글자 그대로 내뱉은 쿠로오가 건넸던 진저 쿠키를 거의 빼앗아 들고는 입안에 우걱우걱 씹어 넣었다. 제 쿠키가 입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지켜본 코즈메가 황당하단 표정을 짓는다.


 “아, 아니! 처음엔 그런 위험한 걸 팔아도 되나, 그런 생각에 따지러 왔는데 이거, 굉장히 맛있었거든요. 그, 가게에 소문이 좀 안 좋게 나기도 했고, 죄, 죄송했습니다!”


 결국 마무리는 뛰쳐나가는 것으로 지어진 쿠로오의 첫 번째 위저드 베이커리 방문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2.

  위저드 베이커리. 독특한 컨셉과 수상쩍은 효과들로 별로 좋지 못한 소문이 자자한 코즈메 켄마의 베이커리다. 그런 베이커리에 말도 안 되는 효과들을 정말로 전시해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 온 쿠로오는 키만 멀대같이 큰 남자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약간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니까. 거기 주인이 엄청…….”


  예뻤지.


  “엄청 무서웠고…….”



  예뻤지.


  “무섭고, 냉기가 풀풀 새어 나오고, 푸딩 머리에,”


  예뻤지.
  사실 쿠로오 테츠로군의 위저드 베이커리 방문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BREAK TIME으로 돌린 표지판은 조금 시간이 지나고서 다시 들려 봐도 바뀌지 않았고 다시 몇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예 CLOSE로 바뀌어 있었다.
  그 주인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처음 보는 사람에겐 효과도 없다더니만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쿠로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진저 쿠키의 마법이 자신에게 걸린 것이라고. 단정하고 고운 선의 그 얼굴이 자꾸만 생각나는 이유에 그렇게 해답을 붙이고는 상승하는 입술의 곡선을 막지 않았다.



‌                                                                                                                                *          *          *



   끼익, 거리는 나무문이 열린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달려온 쿠로오보다 먼저 온 손님은 쿠로오에게 진저 쿠키를 준 여학생뿐이었다. 코즈메는 여학생의 상담을 들어주는 듯 카운터에 기대어 있었고, 아직 밀가루가 묻은 손을 털어내지 못한 채였다.

   “그래서, 이거면 된다는 거죠?”
   “계속 말하지만 상대가 기본적으로 너한테 호감이 없으면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아.”
   “그래도 안 주는 것 보단 낫잖아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저기 당사자가 앞에 있는데 괜찮겠어?”

   아무래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여학생뿐이었던 듯, 코즈메가 눈짓으로 문 앞을 가리켰다. 못 할 짓을 들킨 것처럼 여학생이 다급하게 코즈메를 재촉한다. 느릿느릿, 결코 빠르지 않은 손으로 계산을 마친 코즈메가 머랭 쿠키를 다시 여학생에게 건넸다. 와중에도 여학생은 “안녕, 쿠로오군!” 이란 인사를 빼먹지 않은 것에 내심 근성은 있다고 생각하던 코즈메였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왔는데?”
   “그, 방금 사간 건 뭐예요…?”
   “플루토 가루 머랭 쿠키.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면 일시적으로 가슴을 뛰게 해서 흔들다리 효과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쿠키야.”

   그런 걸 팔아도 되는 거예요? 그런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저 고운 얼굴을 보면 그런 말도 쏙 들어가기 일쑤였다. 쿠로오는 이렇게까지 자신이 얼굴을 따지는 사람이었던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아닐 거야. 그냥 왠지 모르게 드는 위압감이나, 연상의 어른스러움, 그에 비해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무뚝뚝한 표정. 그것들이 사춘기의 쿠로오를 건드렸다. 몽환적이고 싱그러운 가게의 분위기도 한몫을 하는 것 같았다. 쿠로오의 표정이 시시각각 혼자 변하자 코즈메는 다시 한번 표지판을 BREAK TIME으로 돌려놓았다.

   “쿠로오군. 할 일 없이 드나드는 건 사절이니까 아르바이트라도 할래?”
   “네?”

   뜬금없는 제안이 밀가루 묻은 종이 한 장과 함께 쿠로오의 손에서 툭 떨어졌다. 어디서 날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아르바이트 모집?”
   “네가 그랬잖아, 소문이 안 좋다고. 가게 홍보랑 판매. 일당은 적당히 해줄 거고, 보너스로는 여기 있는 것들 중 하나를 가져갈 수 있게 해줄게.”

   그때의 쿠로오씨는 대체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덥석 네! 라는 대답을 뱉어버린 뒤 스스로 날아가 코즈메의 손에 안착한 종이를 보고서야 쿠로오는 자신이 ‘잘못 걸렸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했잖아. 마법사라고. 그럼, 잘 부탁해, 쿠로.”




3.
 
   쿠로오의 아르바이트는 순조로웠다. 원래 입담이 좋기도 했고, 위저드 베이커리의 묘한 컨셉을 아예 인기몰이로 만들어버린 능청스러움도 한몫을 했다. 그것이 썩 만족스러웠던 코즈메의 쿠키나 빵, 케이크들은 금방금방 팔려나가기 일쑤였고 둘은 오후 8시가 되면 텅 비어버린 진열대를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훑어보곤 코코아를 한잔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켄마씨. 마법사가 왜 이런 베이커리를 하죠? 쿠로오씨는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것도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마법사들도 개인의 사정이 있는 법이야. 쿠로는 아직 어려서 말해줘도 모를 테니까 말 안 할래.”


  근 한 달 동안 이 마법사는 몰래몰래 마법을 사용하곤 했다. 가까운 물체를 던지는 척 자신에게 손짓만으로 가까이 오게 만들거나, 안쪽에서 제빵을 할 때면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두 개쯤은 더 나타나 함께 반죽을 하곤 했다. 코즈메는 쿠로오가 제빵을 하지 못해 불만이라고 했지만 분명 그는 쿠로오의 역할에 충분히 감탄하고 기대 이상의 수익을 보고 있었다. 때문에 마법의 묘약을 탄 코코아를 대접하는 코즈메는 늘 몸을 노곤노곤하게 해주는 귀한 설탕을 섞어 쓴다고 자부했다. 그런 코즈메가 이제는 익숙해지다 못해 소중해질 무렵. 쿠로오는 처음 만났을 때의 제 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묘한 거리감은 어른스러움이 아니라 단순히 새침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오히려 손길이 많이 가는 어린애에 가까운 코즈메는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곤 오히려 쿠로오의 주도 하에 베이커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코즈메도 쿠로오에게 너무 익숙해진 탓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비록 마법 지팡이는 없지만 손짓으로 가게 운영 수익표를 공중에 띄워 보여주는 코즈메가 항복 선언을 하던 날이 있었다.


  “항복이야, 쿠로. 쑥맥인 아르바이트생 하나 골려주려고 했는데 너무 가게 운영을 잘했어.”
  “그런 것 치곤 너무 당당한 표정이잖아…….”
  “상으로 쿠로의 소원을 들어줄게.”
  “정말?”


 상이란 말에 노곤하게 늘어진 몸이 벌떡 일어난다. 나무 테이블엔 쿰쿰한 초콜릿 냄새가 배어있었다. 코즈메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 몸을 일으킨 쿠로오가 냉장실에서 붉은색 유리병에 담긴 끈적한 시럽같은 액체를 코즈메에게 내밀었다.


 “이걸 먹어줘.”
 “……그게 쿠로 소원이야?”


 쿠로오가 꺼내온 것은 무려 ‘사랑의 묘약’이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귀하디귀한 것은 코즈메가 자주 사용하는 재료도 아니었다. 금지된 묘약 중 하나였기에 잘 보여주지 않았던 건데 잘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다. 코즈메는 상황에 맞지 않는 프러포즈 같은 쿠로오의 능글맞은 고백에 비식비식 웃음을 흘렸다.


 “쿠로.”
 “응?”
“사랑에 빠질 준비는 됐어?”







‌W.  푸 르 ( @ p u _ r _ e )



켄마는 요즘 가면 갈수록 짜증이 늘었다. 쿠로오가 자꾸만 다른 사람과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말을 걸려고 하면 다른 말로 주제를 바꾸지를 않나 ( 물론 쿠로오는 자기가 말을 잘 돌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 눈을 힐끔힐끔 피할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과의 만남을 피하고 있었고, 그 피한 시간동안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켄마는 자기 자신이 질투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동안 자신은 소꿉친구라는 명목으로 쿠로오와 붙어있었고, 이제는 애인이라는 이유로 쿠로오의 옆에 있었다. 이런 기간만 이십여 년, 소꿉친구는 태어났을 때 부터, 애인은 켄마의 5년 전 생일으로 부터 지금까지. 켄마는 어쩌면 쿠로오가 자신을 질린 건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없는 시기였다. 어쩌면 권태기때 이후로 가장 위험한 순간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 아, 야치상. 그래서 꽃은 어떤 종류가 이쁜데? 역시 장미 일려나. "


 또, 다시 시작 됬다. 쿠로오는 옆에 켄마가 있는 지도 모르고 야치와 대화를 나눴다. 언뜻, 누가 보면 작업을 거는 것( 당연히 아니었다 )과 비슷해 보일정도로 묘한 질문들의 향연이었다.

 꽃은 어떤 종류가 이쁘지?
 식사는 어디서 하는 게 로멘틱하려나?
 오야오야, 그럼 양복이 어울릴까, 캐주얼한 게 어울릴까 데이트 하려면?

 켄마는 완전히 직감했다. 쿠로오는 자신에게 질려버린 게 분명하다고. 과거 네코마의 세터를 했던 경력을 조면 켄마, 자기 자신의 감은 90%정도의 확률로 맞았고, 지금도 맞을 꺼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끝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와 반대로 요즘 쿠로오는 행복에 젖어있었다. 행복과 함께 피로감과 힘듦이 같이 찾아오는 게 문지였지만 말이다. 곧 쿠로오와 켄마가 사귄지 5년에 다다르고 있었다. 곧 켄마의 생일도 찾아오고 있었고.

 켄마의 생일과 5주년 기념일은 같았다. 켄마의 23번째 생일날, 쿠로오는 켄마에게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23번째 생일날이었다. 대학동기, 네코마의 후배와 선배들. 친구들. 가족들. 음식점 직원들에게도. 켄마가 모든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고 밤이되자, 쿠로오는 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만나자고 하였다.


 ' 아, 되게 중요한 걸 빼먹은 것 같았는데. 쿠로오였구나. ‘


켄마에게 쿠로오는 그런 존재였다. 중요하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닌 관계 . 이 정도 관계도 쿠로오와의 오랜 시간 덕분에 얻을 수 있는 거였다. 신경 쓰는 사람은 가족말고는 아무도 없었고, 신경 쓰지는 않아도 중요한 존재는 쿠로오, 그리고 게임이나 애플파이 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쿠로오의 외침에 켄마는 나갔다. 어차피 가는 곳은 집근처의 술집이었다. 가격도 적당한데 맛까지 있어서 쿠로오가 자주 가는 곳이었다. 술을 마시고 간단히 축하의 말을 하고 평소처럼 마셨다. 쿠로오는 취했고, 켄마는 게임을 하느라 먹는 둥 마는 둥해서, 취하지는 않았다. 퀴한 상태에서 또다시 쿠로오가 입안에 술을 들이부은 다음, 말했다.


“ 켄마, 내가 좋아하는 거 알지? ”
“ 그래그래, 알지. 그럼 우리 이제 집가자, 쿠로오 너 취했어. ”


켄마는 느꼈다. 쿠로오는 지금 취했다는 것을.  술에 취하면 쿠로오는 켄마에게 불이 살 정도로 고백을 해왔기 때문이다.


“ 켄마 좋아해. 좋아해! ”
“ 쿠로오, 너 지금 자꾸 고백만 하잖아. 지금 취했다고! ”


 쿠로오의 다음말은 켄마를 얼게 했지만 말이다.


“ 나 이거 술버릇 아닌데. 나 술 취해도 남한테 고백은 안 해. 너니까 하는 거야 켄마. ”
“ 뭐? ”
“ 우리 사귀자. ”


 정말 좋은 고백이었지만 쿠로오는 켄마에게 고백을 하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갔으며 모두가 생각하는 일을 하고서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켄마, 부탁해.. 라는 말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켄마가 쿠로오를 부축해서 이동하는 그 순간에도 가끔씩 헛구역질을 했다. 켄마에겐 쿠로오의 고백이 첫 번째 고백은 아니었다. 학교 다닐 때도 고백은 몇 번( 물론 쿠로오는 모른다. ) 받았지만, 아직까지는 그런데 관심이 없고 게임도 애플파이도 쿠로도.. 쿠로? 켄마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생각하는 중요한 것을 떠올렸다. 당연한 듯이 쿠로오가 들어가있었으며 나갈 생각은 없었다. 켄마는 어쩌면 쿠로를 사랑할 지도 몰랐다. 그래, 켄마는 이 재미도 없고 끔찍한. 아주 특별한 쿠로오의 고백을 받을 생각이라는 것이다.

 
“ 켄마 어제는.. ”


  다음날 쿠로오는 켄마에게 장난이라는 듯이 말할려고 했으나, 켄마가 말을 끊고 말했다.


“ 나도 쿠로 좋아하는 거 같아. 사귀자. ”


 이렇게 사귀게 됐으니 너무 어정쩡했다. 중간중간 기념일도 열심히 챙겼으나, 그래도 이번 5주년은 조금 다르게 프로포즈를 할 생각이었다. 다른 여사원들의 도움이 조금 필요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느라 많이 힘들었지만 말이다.

 레스토랑, 꽃, 입을 옷 등등. 완벽하게 모든 것을 짜놓은 쿠로오는 이제야 한시름이 놓였다. 이제, 켄마에게 허락만 맡으면 된다.


“ 켄마, 모레 나랑 좀 데이트하자. 내일 특별한 날이잖아. ”


 데이트? 특별한 날? 전혀 그럴 거 같지 않은 켄마는 지금 질투중이라 바빠서 그런 단어같은 건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 싫어. 모레 나 바빠. ”
“ 켄마, 너 모레 할 일 없잖아. ”


 그 말에 또 왠지 화가 나서 약속이 있다고 하는 데 아웃싸이더 켄마에겐 약속이라고  할 게 없었다. 그 자리를 지나가던 아카아시만 불쌍했을 뿐.


“ 나 아카아시랑 약속 있어, 그렇지? ”

“ 네 그렇죠, 아니 네?”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뜨거운 눈빛을 다 받아내고는 약속을 당겼다. 안 그러면 지금 저 질투인지 저주인지 모르는 눈빛에 몽땅 다 타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켄마상, 저 바쁘니까 모레 약속 내일로 합시다. 네? 저 모레에 보쿠토상 만나야해요. ”


 그래서 켄마와 아카아시는 그 다음 날 만나게 되었다. 켄마는 애플파이와 함께 따뜻한 핫 초코를, 아카아시는 아메리카노를 시키고는 잡다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점점 본격적인 주제로 넘어갔다.


“ 그래서, 약속도 없는데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뭐죠? 쿠로오상의 눈빛에 저 타죽을 뻔 했다니까요.
“ 쿠로오가 바람을 피는 거 같아. ”


  풉,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린 아카아시를 켄마가 째려봤다. 며칠 전 아카아시도 쿠로오에게 프로포즈에 대한 걸 들었기에 말해줄 수는 없었지만 서둘러 켄마를 내보냈다.


“ 잠깐만 나 애플파이 아직 더 먹었어. ”
“ 일단 내일 하루만 만나주고 헤어지던지 말 던지 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 ”


  쌩하니 가버린 아카아시를 보며 켄마는 집으로 돌아갔다. 켄마는 쿠로오에게 내일보자는 문자를 남겨두고는 잠을 청했다.  


 다음 날이었다, 잠은 생각보다 좋은 도피처가 되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쿠로오는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는 켄마를 데리러 왔다. 켄마는 쿠로오를 따라 대충 옷을 갈아입고는 집을 나왔다.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쇼핑을 하고 평소와 같은 데이트를 하고 난 다음, 식당에 갔다. 평소에 자주 가는 곳이 아닌 레스토랑이었다. 로멘틱한 노래가 흘러나왔고, 켄마는 점점 빡치기 시작했다. 아니, 얼마나 기다려야하는 건데. 쟤는 그냥 바람피는 놈이라고. 가능성은 어느새 확실이 되었다.


“ 켄마 , ”
“ 왜? ”
“ 나랑 결혼하자. ”


쿠로오가 붉은 장미 다발을 들고는 프로포즈 해왔다. 켄마는 그동안의 의심에 프로포즈라는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보았다. 아, 말이 되네.


“ 난 너의 푸딩같은 머리가 좋아. 난 너의 소심한 성격이 좋아. 너랑 평생을 함꼐 하고 싶어. ”
“ 그래, 쿠로. 바람만 안 핀다면 말야. ”
“ 난 바람 필 생각도 없어! ”
“ 그래. ”


                                                                                                                                     *          *          *



프롤로그,


“ 아카아시도 알았어? 쿠로오가 프로포즈 할 거 라는 걸? ”
“ 알고 있었으니까 말했죠. 지금 와서 말하지만 얼마나 웃겼는 지 알아요? ”
“ 나는 당연히 쿠로오가 바람을 필 줄 알았다고. 누가 알았겠어. 프로포즈를 할 줄은. 나는 정말 몰랐어. 티도 안내고. 아닌가? 냈나? ”
“ 여직원이라는 여직원에게는 다 물어보고, 심지어 남자에게도 물어봤다고요. 저한테도 쉴새없이 물어봤는데 얼마나 머리가 아프던지. ”
“ 그렇구나. 그래서 나 결혼하기로 했어. 여기 청첩장 ”
“ 쿠로오씨가 드디어 일을 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
“ 그래, 나중에 꼭 와야해. 보쿠토씨랑 같이. ”
“ 당연하죠. 뭐. ”







W‌.  해 닮 ( @ h a E d a m _ _ o V o )



코즈메 켄마는 어려운 일을 싫어했다.

굳이 나서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았다. 새로운 일은 웬만해서는 피했다. 마음을 터놓는 상대는 어릴 적부터 함께한 쿠로오, 유일하게 ‘시도’했었던 일은 배구. 그 정도였다.


본인이 인정한 적은 없지만, 켄마의 삶에 있어 쿠로오는 게임과 거의 동일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밥을 제대로 챙겨먹지 않거나 게임기를 종일 붙잡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꾸짖는 쿠로오는 아침에 해가 뜬다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했다. 무작정 혼내지 않고 타이르는 방식이 좋았다. 가령 밥을 먹지 않았을 때는 일단 애플파이를 먹이고 나서 아이 혼내듯 제대로 먹어야지, 하는 것. 켄마는 지금 쿠로오와의 관계에 만족했고 거기에 안주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코즈메 켄마는 어려운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 지금 쿠로오는 그에게 어려운 고민을 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꾸만 전자음 섞인 게임 오버, 가 흘러나오는 게임기를 결국 손에서 놓았다. 몇 시간째 붙들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원래도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지만 3시간이 넘어가면 어김없이 쿠로오에게서 어떤 식으로든 연락이 왔기 때문에(메일을 보내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직접 쳐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쯤이면 게임을 밤으로 미뤘었는데,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부모님은 야근이 잦았고 켄마는 요리에 능하지 않았기에 밥을 차려 먹은 적은 손에 꼽았지만, 애플파이는 훌륭한 대용품이 되어 주었다. 익숙하게 냉장고의 맨 윗칸을 열어 3일 전 쿠로오가 한가득 사다 준 그것을 꺼내 먹었다. 그 칸은 항상 파이로 가득 차 있곤 했다.


사건의 발단은 하굣길, 집 앞에 다 와서는 평소와 다르게 망설이던 쿠로오가 꺼낸 말이었다.



“켄마.”
“응.”
“그, 켄마.”
“말해.”
“내가 싫어?”



밑도 끝도 없이 튀어나온 말에 줄곧 게임기에 향해 있던 눈을 쿠로오에게 돌렸다. 쿠로오는 뭐라 형언하기 힘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의 능글맞음은 어디 가고, 복잡한 표정의 십 대 소년이 거기 있었다.



“……그건 왜.”



어째서 아니라는 말이 바로 나가지 않았는지 켄마는 알지 못했다. 싫지 않다는 확신이 안 섰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거기서 대화를 끝맺고 싶지 않았던 게 이유였던 것 같다. 어쨌거나 쿠로오는 웅얼웅얼 대답을 주었고, 켄마가 한 번 더 말해보라 했을 때 한 마디를 남기고 쏜살같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아서.


파이 안에 든 달달한 애플 잼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그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그가 저를 좋아하는 것과 저가 그를 싫어하는지 싫어하지 않는지가 관계가 있나? 그건 둘째 치고 왜 나를 좋아하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려운 질문도 새로운 관계도 별로인데. 해가 져서 밖은 깜깜했다. 쿠로오의 집과 마주 보는 창문을 열어도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냉장고가 떠올랐다.




‌                                                                                                                                     *          *          *




그날 아침, 쿠로오는 데리러 오지 않았다.


홀로 걷는 도로가 넓다든가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애플파이가 조금 먹고 싶고, 잠을 설친 탓에 늘어진 몸이 무겁고.


어깨에 느슨하게 걸친 가방 끈을 고쳐 잡고 교문을 지났다. 켄마의 반은 3학년과 붙어 있는 3층 복도에 있었지만, 3학년 5반부터는 4층에 있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야마모토였다.



“켄마. 쿠로오 상이…….”



야마모토는 쿠로오가 켄마에게 방과 후 연습 전에 자기한테 잠깐 따로 오라는 말을 전해달라 했다고 말했다.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 교실에 들어섰다. 주장과 무슨 일 있었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점심시간까지 쿠로오는 나타나지 않았다.


20분이 지나도록 기척이 없기에 교실에 앉아서 도시락을 열었다. 흰 쌀밥, 계란말이, 김. 몇 번 깨작이다 결국 젓가락을 놓고 말았다.


소꿉친구의 얼굴을 본 건 정말 연습 시작하기 얼마 전 야마모토의 전언에 따라 체육관으로 내려갔을 때였다. 벽에 느슨하게 기대어 있던 쿠로오가 켄마의 기척에 자세를 바로 했다.


“켄마.”
“응, 쿠로.”


별 것도 아닌 인사였는데도 왠지 심장이 횡격막에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동요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자 쿠로오가 머리에 손을 얹었다.


“왜 안 왔어.”


그야 네가 오지 않았으니까.


모호한 질문에 하고 싶었던 말을 삼키고 고개만 살짝 저었다. 무슨 의도로 그런 걸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답 대신에 머리에 얹힌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래서, 생각해 봤어?”
“뭘?”
“내가 널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거 말야.”
“아, 응…….”

“어때? 할 거야?”



목적어가 없는 문장이었다. 그러나 뭘 묻는지 알 것도 같았다. 쿠로오가 대답이 없는 켄마를 놔주었다.



“알겠어.”



뭘 알겠다는 건지. 어제부터 쿠로오는 뜻 모를 말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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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오랑 무슨 일 있었어?”



연습 후 늘 같이 하교하던 쿠로오는 급한 일이 있다며 먼저 가 버렸다. 네트를 주섬주섬 정리하는 켄마에게 말을 건넨 것은 야쿠였다. 흩어진 공을 줍던 시바야마가 잠깐 이쪽을 봤다가 도로 시선을 돌렸다. 눈치도 빨랐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도 아는 아이였다. 켄마는 타인을 위해 침묵을 지킨다기보다는 애초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었기에 자신의 궁금증보다는 타인의 마음을 우선하는 시바야마를 알게 모르게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아뇨, 별로…….”



그러지 말고. 조금 느리게 꺼낸 대답에 야쿠가 웃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상반된 감정을 표현하는 제스처 두 개를 한꺼번에 쓰는지 새삼 궁금해졌다.



“어제 뭔 일 있었지? 너희 오늘 한마디도 안 한 거 알아? 싸운 것 같지는 않은데, 묘~하게 서로 눈도 안 마주치고 말이야.”



야쿠는 귀엽고 작은 느낌을 주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어른스러운 면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을 세심하게 살피는 것도 재주다 싶었다. 켄마가 결국 입을 열었다.



“쿠로오가…… 저를 좋아한대요.”
“뭐?”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당황스러울 때의 버릇대로 야쿠가 한쪽 눈썹을 내리고 웃었다. 혼자 중얼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고백이네? 그걸 네가 거절한 거야?”
거절한 건가?



켄마는 근 이틀을 되짚어 보았다. 쿠로오가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어떻게 반응했었더라. 무반응이었지.
잠시 고민하다가 우물쭈물 “아뇨,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입을 열었다. 야쿠가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럼 싫지는 않은 거네.”



생각해보니 그랬다. 싫을 리가 없다. 그거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싫지 않다는 건 좋다는 게…… 되나?


혼란스러운 낯을 한 세터의 어깨에 리베로가 손을 얹었다.



“코트 위에서나 밖에서나 너를 위해 쿠로오가 해주는 게 그렇게나 많았는데 눈치를 못, 아니 안 챘다니 너도 참 대단하다. 어제부터 둘이 서로 얼굴도 안 봤지? 혹시 그래서 뭐 섭섭하다거나 쓸쓸하다거나…… 하다못해 낯설지는 않았어? 그 상황이?”



당연히 섭섭하고 쓸쓸하고 낯설었다. 켄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야쿠가  삼촌이 조카에게 하듯 어깨에 얹었던 손을 들어 등을 두드렸다.



“어제 쿠로오 보고 싶었지? 걔 없이는 제대로 못 살겠다 싶고.”



야쿠가 제가 말해놓고 오글거린다며 으으, 소리를 뱉었다. 켄마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등을 한껏 팍팍 치는 선배였다.



“그럼 그거네, 좋아하는 거네.”



그대로 얼어붙은 켄마에게 야쿠가 그럴 줄 알았다며 몇 마디를 더 건넸다. 몸이 굳으면서 뇌까지 얼어버린 건지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쿠로오에게 제대로 대답해줘,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시바야마는 공을 모조리 수레에 담아놓고 창문을 하나하나 걸어 잠그고 있었고, 켄마는 걸어서 집까지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쿠로오네 집을 잠깐, 아니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날도 켄마는 저녁을 먹지 않았다.


게임도 하지 않았다.


대신 멍하니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잠한 라인을 켰다 껐다, 메일 창에 들어갔다 나왔다. 무얼 기다리는지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오늘 온 라인은 딱 하나, 야쿠가 보낸 것이었다. 하도 읽어 외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소파에 앉아 있다가 과제라도 하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 가방을 열었지만, 유인물을 가져오지 않은 걸 알곤 뭔가 하기를 포기하고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스스로도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야쿠의 말대로 자신은 쿠로오를 좋아하니까 어 ‘제대로 대답’해주면 되는 일 아닌가, 싶다가도 과연 그게 좋아하는 것일지 의문이 들었다.


어느새 잠든 건지 기억도 안 났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정리하고 입고 있던 하얀 티셔츠를 갈아입었다. 시곗바늘은 열두시 조금 전에 가 있었다. 날짜는 10월 중순쯤 됐겠거니 추측하는 게 고작이었다.


대충 이를 닦고 세수하고 나오니 자정이었다. 여전히 잠잠한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마법처럼 진동이 울렸다. 다섯 번쯤 연속으로. 반사적으로 빠르게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혹시나, 설마, 하는 마음으로 메일함을 열었다. 그 짧은 새 라인이 몇 개 더 왔다.


발신인 칸에는 쿠로오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았다. 시바야마에게 온 메일, 야마모토와 후쿠나가가 보낸 라인…… 모두 생일을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상단바에 10월 16일이라고 적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읽음 표시가 되어 있는 메일이나 라인에 답이 없다면 기분 상하겠지. 대충 축하해줘서 고맙다는 메일을 보내고 폰을 놓았다. 까만 화면에 비춰지는 얼굴은 다소 우울해 보였다. 시계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무릎을 당겨 안았다. 소파에 몸을 묻으면 사라질 것 같았다. 12시 0분이 지나기 몇 초 전이었다. 초침이 저 작은 눈금에 다다르면, 째깍, 째깍…….


12시 1분으로 넘어가기 직전, 초인종 소리가 적막을 깼다. 무릎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대답이 없자 초인종이 한 번 더 제 할 일을 했다.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을 때 보인 것은 가장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다.



“생일 축하해, 켄마.”



그의 손에는 켄마가 제일 자주 가는 베이커리의 상표가 찍힌 상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크기가 큰 것부터 차례대로 손에 쥐어주었다. 너 또 저녁 안 먹었지, 하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고마워, 쿠로…….”



쿠로오는 별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나 갈게, 하고 떠나가는 쿠로오의 뒷모습을 잠깐 보다 문을 닫았다. 그는 아직도 검은 티셔츠에 빨간 바지 차림이었다.
큰 상자 안에 든 건 생크림 케이크, 작은 상자 안에는 애플파이 몇 개. 노릇한 빵 위로 무언가 후두둑 떨어졌다.



[켄마 너는 쿠로오랑 지금 관계가 너무 좋아서, 바꾸고 싶지 않은 거지? 근데 쿠로오는 그걸로 만족이 안 될걸? 네가 쿠로오가 계속 생각나고, 보고 싶고, (으 오글거려) 쿠로오가 우울해 있는 게 싫다면 받아줘. 특히 마지막, 누군가 우울한 게 싫고, 그 사람한테 상처주고 싶지 않고, 네가 위로해 주고 싶고 그러면 거의 100% 확률로 좋아하는 거야. 새로운 경험도 나쁘지 않을걸. 친구였을 때는 못하던 거 해보고 싶지 않아? 파이팅이다✌]



야쿠의 메일이 떠올랐다. 액정 너머로 미소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최근에 애인이 생겼다던 그가 조금 경험자처럼 보여서 신기했다.

상자 날개를 붙잡고 있던 켄마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눈에 묻은 물기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휴대폰만 주섬주섬 들고 집을 나섰다. 쿠로오는 아래층에 살았다.


“쿠로!”
“켄마?”



잠기지 않은 문을 열어젖히고 친구의 품에 뛰어들었다. 옷을 갈아입던 쿠로오가 화들짝 놀라 집어들던 티셔츠를 떨어뜨렸다.



“할게. 할래. 하자.”



근본 없는 말에 잠시 굳었던 쿠로오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익숙한 팔이 등을 감쌌다.



“야쿠 상이…… 생각해봤는데, 나도, 나도 안 싫어. 좋아. 미안해.”



횡설수설 늘어놓는 말을 쿠로오는 전부 알아듣는 것 같았다. 팔에 힘을 주었다.



“그래, 하자.”



그 말에 왜 눈물이 터졌는지는 죽었다 깨나도 알지 못할 것이었다. 쿠로오가 품에서 켄마를 떼어놓고 눈가를 쓸어주었다.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말을 꺼냈다.



“켄마. 지금 밤인데. 우리 부모님 야근하시고.”
“……?”
“그리고 너 지금 나 옷 갈아입는데 덮친 거 알지.”
“덮……?”



뒤늦게 켄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당황한 켄마가 발을 떼기도 전에 쿠로오가 팔을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어허. 먼저 와놓고 이제 와서 도망치려고?”



켄마의 손에서 휴대폰이 떨어졌다. 리에프와 야쿠가 뒤늦게 보낸 라인 알림으로 진동이 울렸다.
코즈메 켄마는 어려운 일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