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마가 문득 시계를 봤을 때의 시각은 밤 11시 55분이었다. 켄마는 진행 중이던 게임을 잠시 멈추고 핸드폰 전원을 껐다. 12시가 되자마자 쏟아질 메일들이 귀찮았다. 정확히는, 친하지 않은 관계인데도 친한 것처럼 구는 말들이 부담스러웠다. 오늘부터는 네가 형이라느니 우리 켄마가 벌써 몇 살이 되었다느니. 켄마는 적당히 '코즈메 군, 생일 축하해' 정도의 말을 가장 선호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적당히 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학을 들어오며 꿈꾸던 ‘아싸’ 생활은 같은 과인 쿠로오 때문에 꿈으로 남게 되고, 애매하게 얼굴을 익힌 과 사람들이 늘어나서 더 그랬다.
마음에 조금 걸리는 건 네코마의 팀원들 정도. 하지만 켄마를 잘 아는 사람들은 켄마가 와르르 쏟아지는 메시지를 귀찮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굳이 열두 시에 이벤트성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일을 겸사겸사 해서 곧 다함께 모일 날을 잡아놓기도 했으니 더더욱 그랬다. 쿠로는 술 약속이 있다고 했으니 전화를 하지는 않을테고. 그 밖의 사람들이야 뭐, 어떻게 되겠지. 켄마는 다시 게임기를 집어 들었다.
‘생일, 일주일 남았네?’
‘…그런가보네.’
‘이번 생일엔 뭐 할 거야?’
‘그건, 쿠로가 알고 있는 거잖아?’
‘그렇다면, 쿠로오 씨는 아─주 제대로 된 이벤트를 할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해줘야 해, 켄마. 알겠지?’
생일의 일정은 언제나 비슷했다. 천천히 일어나서, 강의를 듣고, 다 끝나면 쿠로와 데이트. 쿠로오와 함께 맞았던 생일은 늘 그래왔다. 데이트 때 뭘 할지 생각하는 것은 쿠로오의 몫이었다. 새로운 것을 도전하는 데 큰 흥미가 없는 켄마를 위해 대부분 익숙한 곳을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하지만 이번엔 쿠로오가 일주일 전부터 이벤트 예고를 거창하게 했으니 얼마나 제대로 된 이벤트를 가져올지, 켄마는 조금 기대했고, 조금은 얄미웠다. 그렇게 자신만만할 정도로 준비를 했단 말이지. 켄마는 쿠로오가 어떤 이벤트를 가지고 와도 첫 번째 표정은 담담하게 짓겠다고 생각했다. 딱히 이유는 없는 심술이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 시계 초침이 똑딱, 똑딱. 열두시 땡. 그리고 첫 번째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쾅- 쾅 쾅─ 쾅─ 쾅─ 쾅─
딩동- 딩동 딩동─딩동─ 딩동─ 딩동─
“Ha-ppy Bir─th Day─ to─ You─! 켄마─!!”
일반적인 이벤트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순간 켄마의 얼굴에 난감함이 가득 담겼다. 열두 시가 되자마자 자취방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눌러가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짓은 상상도 못했는데.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화르륵 달아올랐다. 게임기를 내던지며 켄마는 서둘러 현관으로 갔다. 문을 빼꼼히 열자 익숙하고도 편안한, 달콤한 연인이자 소꿉친구인 쿠로오의 얼굴이 보였다.
“…쿠로.”
“우리 켄마. 내 켄마! 켄마아….”
“술, 얼마나 마신거야.”
“사랑한다! 켄마! 우리 켄마를 위한 생일- 선-물이 준비되어 있답니다!”
축하는 무슨. 생일 축하를 위한 거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거했다. 어지간해서는 취하지도 않으면서 얼마나 술을 들이부은 건지, 켄마의 자취방까지 찾아온 게 용할 정도였다. 게다가 생일 선물이라고 가져온 박스는 과하게 크고 무거웠다. 그 와중에 들어 옮기는 것을 도와주려고 해도 거부했다. 결국 쿠로오 케어를 포기한 켄마는 가만히 침대에 앉아서 쿠로오를 구경했고, 한참을 끙끙대던 쿠로오는 박스를 들고 들어와 켄마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켄마와 눈을 마주치고 씩 웃은 쿠로오는 박스 안의 물건을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케이크. 저번에 길거리에서 예쁘다고 했던 거. 고양이 장식 올라간 게 켄마 닮았지? 일부러 올려달라고 했어.
애플파이. 큰 걸로 사왔으니까 잘라서 먹고, 남은 건 얼렸다가 녹여서 먹어.
게임팩. 원래 좋아하던 거 새로운 버전 나왔다고 해서 샀는데…. 벌써 산거 아니지?
이건 VR인데…. 이거 하면 게임하면서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손목 보호대. 우리 켄마는 손목도 소중해. 너무 열심히 게임하다가 손목 아프면 안 돼.
즉석식품. 사실 이런 거보단 내가 밥 해주고 싶은데…. 밥 잘 먹고 다녀. 살 빠지면 속상해.
영양제. 아프지 말자, 켄마. 귀찮으면 내가 매일 챙겨서 줄게.
머리끈. 우리 켄마는 머리가 길어서 풀어도, 묶어도 늘 예쁘지. 물론 짧은 머리도 예뻐.
이거는….
이거는…….
하루 종일 이어질 것 같던 설명은 어지러운 방 상태와 함께 끝이 났다. 박스가 바닥을 보이자 쿠로오는 켄마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생일 축하해, 켄마.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 쿠로오는 벌떡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제 집인 양 익숙했다. 자신이 가져온 많은 선물들을 이곳저곳에 착착 정리하고, 욕실로 들어가 빠르게 샤워를 하고, 켄마의 집에 있는 자신의 옷을 찾아 입고, 알아서 베개 두 개를 챙겨 방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쿠로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켄마에게 잘 자. 사랑해. 인사하곤 순식간에 잠들었다. 켄마는 이불 하나를 가져다 덮어주었다.
* * *
해가 막 떠오를 무렵 쿠로오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밤에 했던 짓이 떠올라서 머리를 뜯다가, 그래도 그 와중에 선물 전달이며 설명을 다 하고 곱게 잠들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기들에게 잡혀서 대낮부터 몇 시간 동안이나 술을 마셨으니 그만하길 다행이었다. 켄마가 자취하는 건물에 미리 선물이 든 택배를 보내놓은 것도 스스로를 매우 칭찬할 만 했다.습관적으로 아침 운동을 하고 돌아온 쿠로오는 켄마의 아침 생일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한창 칼질을 하다 보니 등 뒤에서 켄마가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이 바스락 거리고, 웅얼웅얼. 아침 싫어, 하는 목소리가 한껏 잠겨있었다.
“쿠로…….”
“어, 켄마. 일어났어?”
“응….”
“미안. 밤엔 많이 놀랐지? 원래는 어제 저녁이나 오늘 아침에 오려고 했는데… 마음이 급해서.”
“…별로.”
넌지시 지난밤의 일에 대해 떠보려던 켄마는 쿠로오의 사과에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의 부끄러움만 아니었다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생일이 되자마자 눈앞에 나타난 애인이 밉게 보일리가 없었다.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챙겨주고, 건강도 생각하면서 선물을 준비해왔으니 오히려 고맙고 기뻤다. 켄마가 민망하게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쿠로가 와줘서 좋아. 켄마의 말에 쿠로오의 표정이 밝아졌다. 핸드폰 전원을 켜보니 꽤 많은 축하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쿠로오의 메시지도 있었다. 절반은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있잖아, 쿠로. 축하 인사를 받았는데, 누군지 모르겠으면 어떻게 해?”
“감사합니다, 하고 보내.”
“에, 그거면 되나?”
“어차피, 네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그 사람이 모를 테니까. 중요한 사람한테 잘 하는 게 중요한 거지.”
“의외네. ‘모두에게 친절한 쿠로오 씨’ 라면서?”
“설마 그게 알지도 못하는 모두일까. 자자, 어서 씻고 와!”
나머지는 나중에 답장해. 쿠로오에게 등 떠밀려 씻고 나온 켄마는 꽤 거창한 생일상을 받았다. 케이크에 초를 꽂아 촛불을 불고, '축하해, 사랑해'하는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며 한껏 생일 분위기도 냈다. 준비했다던 이벤트도 밤중의 그것으로 넘치도록 충분했다. 하지만 쿠로오가 준비한 이벤트는 이게 아니었다. 밤의 일은 사고였고, 아직 이벤트는 남았다고 말하는 쿠로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잔뜩 묻어있었다. 이렇게나 대놓고 두근두근함을 표출하는 쿠로오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쿠로오를 따라 켄마도 미소 지었다.
* * *
의외로 쿠로오는 강의실 앞쪽에 앉았다. 오늘 강의는 이 수업 하나뿐이고, 이 수업에서는 늘 떨어져 있곤 했지만 의외는 의외였다. 밤 12시부터 켄마를 만나야겠다며 찾아와서, 하루 종일 붙어있으려던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랬다. 강의 끝나면 복도에 있을게. 한창 강의가 진행되는 중에 라인을 받고 쿠로오를 바라보니 습관처럼 또 커플링을 빼서 손가락으로 굴리며 시계를 보고 있었다. 왜 굳이 복도에서. 굳이 지금 라인으로. 수업은 한참 남았는데 시계는 왜. 순간 켄마의 머리가 빠릿하게 돌아갔다. 뭔가 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노크하더니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 배달인가?"
"네, 교수님. 코즈메 켄마 씨. 계십니까?"
행사가 있나, 하고 별 생각 없이 바라보던 켄마의 몸이 순간 굳어버렸다. 설마. 심플한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의 손에는 한 손으로 들기 힘들 정도로 큰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수업을 듣던 학생들도 상황을 알아챘다. 모 과에서 꽃 배달 이벤트 서비스를 한다는 사실은 꽤나 유명했다. 유하기로 소문나서 이벤트 타임으로 많이 지정이 되었던 터라, 이 상황이 꽤나 익숙한 교수는 '코즈메 군?'하며 켄마를 바라보았다. 학생들의 시선이 교수의 시선을 따라가고, 순식간에 주목받게 된 켄마는 고개를 숙이고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걸어 나가는 켄마를 따라 시선도 움직였다. 켄마는 쿠로오에게 찌릿, 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쿠로오는 끝까지 모른척했다.
“익명의 분께서 보내셨습니다. 상품명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네요.”
“전달 감사합니다.”
“메시지 요청도 하셨습니다. 코즈메 씨, 생일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생일을 맞은 코즈메 군에게 박수!”
“아…. 감사합니다….”
복잡한 표정으로 꽃다발을 받아든 켄마의 귀는 발갛게 달아올랐다. 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과 교수로부터 엄청난 박수와 축하 인사를 듣는 것이 부끄러웠다. 켄마는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고맙다고 말하고선 서둘러 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많은 축하를 받는 생일은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낯선 감정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주목받는 것을 싫어한다는 점을 제일 잘 알면서도 굳이 이런 이벤트를 준비한 쿠로의 마음을 가늠하는 것도 어려웠다. 나쁘지는 않지만, 굳이 이런 식으로.
이런 '청춘과 낭만'을 좋아하는 교수는 꽃다발 준 애인과 데이트 하러 가라면서 강의를 일찍 끝내주었다. 말이 익명이지, 모두가 애인의 선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켄마도 그랬고, 익명 뒤의 그도 그것을 노렸다.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꽃다발을 어찌하지 못하고 책상에 올려두던 켄마는 강의가 일찍 끝났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들은 켄마에게 감사 겸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에 대답을 해주느라 정작 켄마는 한참 뒤에야 강의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쿠로오는 진이 빠진 켄마를 두 팔 벌려 맞이했다. 켄마는 살짝 눈을 흘겼다.
“쿠로, 진짜.”
“어때? 선물.”
야심차게 준비한 이벤트의 반응을 기대하며, 쿠로오가 웃어보였다. 이벤트라고 말하던 게 이런 것일 줄은 몰랐던 터라, 하나도 안 놀란 척을 하려던 켄마의 계획은 제대로 무너졌었다. 쿠로는 두근두근하는 표정으로, 또 한편으로는 약간의 걱정을 가지고 물었다. 일단 사람들을 이렇게 상대하던 게 힘들었으니 켄마는 쿠로오의 품에 폭 안겨들었다. 오야, 힘들었구나? 등을 토닥이며 천천히 쓸어주는 쿠로의 손길이 기분 좋았다.
“이거 너무 크지 않아? 들고 다니기도 불편하고….”
“헤에, 꽃다발 이렇게 공개적으로 보냈다고 혼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지? 이런 새로운 경험.”
“…뭐…. 그냥.”
“내가 들어줄까?”
“아니. '익명'의 사람이 준건데, 어떻게 쿠로한테 들어달라고 하겠어?”
“윽.”
“좋아하는 꽃, 잘 고르긴 한 것 같네.”
나가자. 다음부턴 쿠로가 직접 줘. 켄마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자 쿠로오는 씩 웃으며 뒤를 따랐다. 한 팔 가득 꽃다발을 안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예쁜 꽃을 한가득 안고 꽃향기를 맡고 있는 장면은 혼자 보기 아쉬우면서도 남을 보여주기 아까웠다. 쿠로오는 올해 잘한 일의 리스트에 꽃다발 선물을 추가했다. 내년엔 캠퍼스 광장에서 공개 프러포즈를 해볼까. 앞서 걷는 켄마의 반 발짝 뒤를 따르던 쿠로오는 캠퍼스를 벗어나자 나란히 섰다. 두 사람의 손은 자연스럽게 얽혔다.
* * *
의외성이 짙은 이벤트는 여기까지였다. 이후는 꽤나 평범한 데이트가 이어졌다. 누굴 만나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다녔다. 켄마의 한 손은 자신이 준 꽃다발에, 한 손은 자신의 손 위에 있다는 사실은 쿠로오에게 꽤나 큰 만족감을 주었다. 쿠로오를 타박하면서도 꽃다발을 끝까지 자신의 손으로 들고 다니는 모습이 예뻤다. 쿠로오는 켄마 몰래 사진을 백오십장 정도 찍었다. 오늘따라 텐션이 높은 켄마는 먼저 어디로 가자고 이끌기도 하고, 둘만 있을법한 공간에 들어오면 입을 맞춰오기도 했다. 쿠로오는 켄마의 두 배로 텐션을 높였다.
“쿠로, 사진찍자. 여기. 하나, 둘, 셋─”
“오늘따라 우리 켄마, 왜 이렇게 예쁠까.”
“나 원래 예쁜데.”
“허어, 언제부터 본인이 이렇게 예쁜걸 알게 된 걸까?”
“쿠로가 예뻐해 준 다음부터?”
빛을 받은 켄마의 눈동자는 더 예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쿠로오는 켄마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가끔 이런 말들을 눈 깜빡 안하고 해올 때면 쿠로오는 참기 어려웠다. 자신에게 익숙하고 안정적인 것을 좋아하면서도, 종종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켄마가 좋았다. 켄마는 딱 이 정도의 새로움을 즐겼다. 쿠로오가 이끈 나머지의 공간들은 모두 익숙한 곳들이었다. 익숙한 카페, 익숙한 게임방, 익숙한 레스토랑과 칵테일바, 켄마의 자취방. 아, 가장 익숙한 곳. 가장 안정적이고, 쿠로와 꽤 오랜 시간을 보내온 곳. 켄마는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몸은 피로하고, 마음은 가장 편안해져서 노곤해졌다. 그리고 쿠로오는 그런 켄마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아, 쿠로, 신발은 벗고─”
“응, 신발….”
“아니, 내가 벗을, 알겠어, 알겠어.”
이불 위에 놓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입을 맞춰오는 쿠로오를 굳이 밀어낼 이유가 없었다.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이마를 맞대고, 눈을 맞추며, 쿠로오는 밤하늘을 가득 담은 듯 깊은 눈동자로 켄마의 모든 것을 담아냈다. 방까지 왔으니 이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듯, 켄마를 안아들어 신발을 벗기고 침대로 옮기고 외투까지 벗겼다. 그리고 그 잠깐의 틈이 아쉽다는 듯 다시 입술을 맞댔다. 이번엔 켄마가 먼저였다. 진득한 키스가 이어지며 단추가 하나둘씩 풀려나갔다. 켄마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볼을 감싸는 쿠로오의 손길은 평소보다 더 다정했다. 입술을 떼고 서로를 다시 마주보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급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기분 좋─게 모시겠습니다.”
“푸흡…. 응, 잘 부탁해, 쿠로.”
“그럼, 그럼. 쿠로오 씨 믿지?”
야심한 시각이었다. 쿠로오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웃음이 한 번 더 터졌다. 웃음을 집어삼키며 입맞춤이 이어졌다. 시계는 열두시를 향해 달려갔다. 마음은 급하더라도 쿠로오의 손길은 급하지 않았다. 켄마가 새로운 지금에 익숙해지도록 천천히. 이 밤은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켄마 생일 축하해. 넌 나의 빛이야. 나의 행복이야.
아무런 기억이 없다.
눈을 뜬 지 꽤 지난 것 같은데 아직 잘 모르겠다. 내 이름이 쿠로오 테츠로라는 것도 몰랐고 내 나이에 대한 것은 더더욱 실감나지 않았다. 눈 앞에 있는 푸딩머리 소년이 코즈메 켄마라는 것도 조금 전 알게 되었다. 정말 나를 모르겠어?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보였던 이 소년은 내가 자신을 모른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듯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동공이 커졌지만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아직은 잠에서 덜 깬 듯 머리가 몽롱하고 눈은 자꾸 감기는데 눈 앞의 소년이 깨운다. 작게 속삭인다. 쿠로, 낯선 듯 익숙한 부름에 반은 무의식적으로 대답한다. 응. 멍한 머리를 깨우려 주위를 둘러본다. 방은 전체적으로 하얗다. 환기를 위한 것인지 벽 위쪽으로 나 있는 창은 너무 작고 높이 위치해있어 바깥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작게 흘러들어오는 빛으로 지금이 낮인 건 알겠다. 넓은 방 안에 흰 페인트로 칠한 철제 침대가 있고 난 그 위에 앉아있다. 내 앞의 소년은 무심하게 내 손을 만지작거리지만 눈이 마주치자 창백한 얼굴에 걱정이 옅게 스민다. 뭔가 물어보려고 한 순간 멀리서 문이 열린다.
“코즈메 씨, 주의사항 들으셨죠? 수속은 다 끝났고 나가셔도 괜찮습니다. 검사 결과지는 지금 챙겨드리겠습니다.”
목에 걸린 청진기를 보아 의사인 듯한 사람은 소년에게 서류봉투를 건넸고 소년은 그것을 백팩에 넣었다.
“쿠로오 씨, 두통은 없으시죠? 다시 말하지만 억지로 기억해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구역질이 난다면 꼭 다시 돌아오셔야 해요.”
“네, 제가 잘 볼게요.”
의사는 나를 보며 말했지만 대답은 소년이 했다. 의사가 나가자마자 침대 옆에 있던 백팩을 손에 든 소년이 나에게 손을 뻗었다.
“쿠로, 가자.”
“….”
“잘 모르겠지? 가면서 설명해줄게.”
“…그래.”
쿠로, 부르는 목소리는 조용하며 나른한 톤이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가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에 대답하고 선뜻 따라나설 수 있었다. 방문이 열리고 긴 복도를 지나가다 중간쯤 멈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소년이 1층을 누르고 나서야 내가 있던 곳이 지하라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천천히 올라가는 느낌이 썩 좋지 않다. 그런 나를 무심히 쳐다보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이 뭐라고?”
“…코즈메, 켄마.”
“……쿠로는 날 켄마라고 불렀어.”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소년은 고개를 숙이며 작게 대답하고 먼저 나갔다. 얼핏 본 얼굴이 서글퍼 보여 그 발걸음에 맞춰 바로 뒤따라 나갔다. 꽤 많은 출입문을 지나 경비실을 따로 통과한 후 마주친 바깥 풍경은 내가 조금 전 눈을 뜨자마자 소년을 처음 봤을 때처럼 낯선 듯 익숙했다. 그 때 머릿속에 뭔가 떠올랐다.
“켄마.”
“응?”
“몬스터 헌터 시리즈, 다 깼어?”
“…! …응.”
아주 잠깐 놀란 듯 했지만 작게 대답하는 켄마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자리한다.
켄마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아주 천천히 기억나는 것 같다.
* * *
“쿠로, 저녁 약 먹었어?”
“응, 밥 먹고 바로 먹었지.”
켄마는 꼬박꼬박 내 약을 챙겼다. 하루 두 번, 정해진 시간에 먹는 약은 매번 켄마가 확인했고 나는 켄마 앞에서 약을 챙겨먹었다. 켄마가 오늘처럼 늦게 퇴근하는 날에도 켄마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가방도 내려놓기 전에 내 약부터 챙겼다. 켄마는 본인 일보다 훨씬 더 꼼꼼하게 챙겼고, 나는 이런 켄마의 모습이 처음이라 생소하게 느껴졌다.
“왜 브로콜리는 다 안 먹었어? 쿠로 혈압 지금 그렇게 높은 편 아니라 잘 챙겨 먹는 편이 좋아.”
이런 면도 새롭고.
“오늘은 브로콜리를 먹고 싶은 날이 아니었어.”
“…바보. 빨리 와서 마저 먹어.”
“네네.”
“다음 주 화요일 오전에 검사 있는 거 알지?”
“응.”
“아침 일찍 나갈 거니까 전날 되도록이면 저녁 약속 잡지 말고 일찍 자.”
켄마는 배구부에서 활동할 때도 모든 일에 의욕 없어 보였지만 자기 할 일은 다하는 부원이었다. 아무리 하기 싫어도 자신에게 필요하거나 팀에게 영향을 미칠 훈련이라면 귀찮은 내색을 보이긴 해도 끝까지 해냈었다. 켄마가 내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챙길 때마다 고등학교 시절의 켄마가 겹쳐졌고 흐렸던 기억들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사라졌던 기억이 하나둘씩 돌아올수록 내가 놓쳤던 다른 기억이 있을까 전전긍긍했고 혹여 내가 잊고 있던 부분이 드러나 켄마에게 상처가 될까 기억을 되찾는 것에 더 집중했다. 말을 하던 중 켄마의 얼굴이 아주 조금 흐려질 때마다 필사적으로 기억해내려 노력했다.
그래도 켄마는 켄마였다.
“켄마, 너 저녁은?”
“….”
“오야오야, 그럼 안 되는 거 알지? 간단하게 차릴 테니까 먹고 해.”
“….”
분명히 목소리가 들릴 텐데 여전히 켄마의 시선은 닌텐도에 박혀 있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기들을 만나 저녁을 먹고 들어오니 웬일로 켄마가 일찍 퇴근해 집에서 놀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부엌을 둘러보니 역시 밥을 해먹은 흔적이 없다. 최근 밤낮없이 계속 연구실로 출퇴근을 반복해 켄마의 피로도가 높긴 할 것이다. 그렇게 게임을 좋아하는 켄마가 새 게임을 사놓고 바빠서 포장도 뜯지 못했으니 얼마나 짜증이 났을지도 알 만하다. 켄마는 원래 입이 짧지만 이럴 때는 며칠이고 먹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가방을 대충 던져두고 서둘러 냉장고를 열어 간단히 먹을 것을 차렸다. 아침에 먹고 남겨둔 된장국이 있으니 절임반찬들과 내주면 되겠다.
“켄마.”
“….”
“이거 먹고 하지? 쿠로보다 더 커야 하잖아?”
“…바보.”
“네네.”
켄마는 결국 하던 게임을 끊고 나온다. 나오면서 나를 한 번 흘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래도 뭐, 어차피 나올 거면서.
켄마의 머릿속은 아직도 게임 생각인 듯 멍하니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드는 손에 의욕이 하나도 없다.
“켄마, 야쿠가 너 찾던데.”
기계적으로 밥을 먹던 켄마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왜?
“모르지. 너 아침부터 전화 안 받는다던데? 나랑 오전 몇 시에 통화했는지 묻더니 화내고 가버렸어.”
켄마는 어제 밤을 샌 뒤 아침에 퇴근했고 나는 아침 일찍 나가 오전에 잠깐 통화했었다. 나랑 통화한 직후에 야쿠가 전화한 것 같은데 켄마는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벨소리를 끄고 도로 잔 모양이었다. 야쿠 급한 것 같던데.
“아.”
“…아, 가 아니라 빨리 야쿠한테 전화하라고….”
켄마는 켄마였다.
* * *
거의 대부분의 기억은 되찾은 것 같다.
켄마와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고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함께 배구부에서 활동했다.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 켄마에게 고백했고 켄마는 작게 웃으며 받아들여 큰 문제 없이 자연스럽게 사귀게 되었다.
켄마의 수험 기간에도 우리는 항상 함께였다. 켄마는 내가 다니는 대학을 목표로 공부했고 켄마는 별 무리 없이 합격했다. 켄마의 입시 결과가 나오자마자 학교 근처로 집을 알아보았고 얼떨떨해하시는 부모님의 마음이 바뀔까 바로 간단히 짐을 꾸려 이사했었다.
켄마와 한 집에서 함께하는 생활은 정말 행복했다.
생명공학계열로 간 켄마는 전공 분야에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내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구소를 다니게 되어 바빴지만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함께한다는 것이 좋았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 켄마는 이미 연구소에 자리를 잡았고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 같이 여행을 떠나자고 했었다. 함께 배구했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켄마는 영 아웃도어 체질이 아니었음에도 켄마는 별 싫은 내색 없이 여행을 승낙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정신없던 켄마는 떠나기 전날까지 연구소에서 일을 했고 전반적인 여행 준비는 내가 했던 것 같다.
우리 둘 다 원정 경기가 아니면 도쿄 밖을 벗어날 일이 없었던 만큼 여행지를 신중하게 골랐고 함께 오키나와를 가자고 했었다. 켄마가 워낙 바빴기 때문에 짧게 다녀오기로 했던 것 같다.
나리타 공항으로 가던 도중 사고가 났다.
사실 사고 당일의 기억은 없다. 아침에 어떻게 차를 탔는지도 모르겠다. 켄마는 고속도로에서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다고 설명했는데 운전석의 에어백이 터지지 않아 내가 핸들에 머리를 크게 다쳤다고 했다. 더 묻고 싶어도 설명하는 켄마가 힘들어 보여 더 묻지 못했다.
* * *
“모처럼 인데, 응?”
켄마의 생일을 맞이해 오랜만에 켄마가 좋아하는 사과파이를 만들자고 했다. 아침에 영 기운 없는 듯 보이는 켄마를 깨워 일으켜 욕실로 데리고 가 씻겼다. 아무 생각 없이 안겨있던 켄마는 사과파이를 만들자는 말에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아직도 잠이 덜 깼다. 얼마 전에 바꾼 바디워시에서 물씬 풍기는 사과 향에 켄마와 함께 처음으로 사과파이를 같이 만들었던 기억이 났다.
“…우리, 같이 사과파이 만든 적 있지.”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말로 꺼내고 나니 아주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기억 나?”
풀려 있던 켄마의 동공에 힘이 들어가며 나를 바라봤다. 기대있던 몸에도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 졸업하는 날 켄마가 엄청 우울해 보여서 같이 만들자고 했어.”
“…그렇게 엄청 우울하진 않았어.”
켄마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또 이런다.
“울었잖아.”
“안 울었어.”
“울었잖아.”
“안 울었어.”
“울었,”
“안 울었어.”
켄마는 아예 말을 끊어버리며 정신이 조금 든 듯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아오리 사과로 만들면 초록색 애플파이가 나오는 거냐고 했었지.”
멈칫, 켄마가 다시 한 번 굳었다. 그리고 다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작게 입을 열었다. 그만해.
“그럼 같이 만들어보면 되지 않겠냐고 했었고.”
“….”
“맛은 좀 다른 것 같은데 색은 똑같더라, 그치?”
“…바보.”
“그 때 무슨 차 마셨더라?”
“…트와이닝 홍차.”
“맞아. 얼그레이였어. 집에 몇 개 남아 있을 거야. 같이 마시자.”
“…그것도 기억났어?”
“그 때 너가 너무 예쁘게 웃었잖아? 웃는 얼굴이 기억났어.”
“…바보.”
켄마의 얼굴이 천천히 흐려졌다. 씻는 중이라 이미 물기가 가득했지만 뭔가 따뜻한 물이 톡톡 떨어지는 것 같았다.
비누가 묻지 않은 손을 들어 켄마의 눈을 감싸며 젖은 머리를 넘겨주었다. 동그랗게 나온 이마에 작게 입을 맞췄다.
“생일인 만큼 그렇게 예쁘게 웃게 해주고 싶었어.”
“…행이야.”
“응?”
“다행이야, 나만 기억 하는 게 아니라서.”
* * *
“코즈메 군. 아무리 코즈메 군이 직접 다 실험하고 계산했다지만 사람에게는 또 다른 거 알지? 이거 생각보다 부작용이 클 수 있어.”
“나도 알아. 하지만 잠깐 기억을 잃는 것 외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벌써 두 번째야. 첫 번째는 용량이 적었다 쳐도 두 번째는,”
“그만. 내가 알아서 해.”
“코즈메 군….”
“쿠로 준비시켰지? 내가 직접 들어갈 거야.”
“…그래. 너가 알아서 해라.”
“응.”
쿠로와 함께 이 복도를 나설 때가 생각나네.
쿠로가 그렇게 쉽게 나를 잊을 줄은 몰랐어. 어떻게 나까지 잊을 수 있어?
‘삑- 확인되었습니다.’
늘 듣던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린다. 실험실 가운데 침대에 네가 누워있다.
“코즈메 군, 안녕. 저 사람이 말로만 듣던 ‘쿠로’야?”
“…응. 바로 투여 시작해도 되지? 오전에 한 검사 결과 보고 싶은데.”
“응. 모니터에 띄워놨어.”
“고마워.”
“별 말씀을.”
내가 그렇게 가벼운 존재였어? 어쩌지. 난 그거 못 참겠는데.
“그런데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첫 번째보다 용량 더 늘렸던데?”
“…나 혼자 할래. 나가줘.”
“바이탈 멀쩡하니까 뭐…”
“….”
“…알았어.”
쿠로, 정신 깊숙한 곳에 나를 새겨야 해.
“나는 쿠로에게 기회를 준 거야.”
모든 기억을 잊을 때 ‘코즈메 켄마’만은 기억할 기회.
“쿠로가 다시 한 번 더 나를 잊으면….”
곧 눈을 떴을 때 또 다시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바라본다면.
“내가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어.”
쿠로, 너의 모든 기억이 다 사라지는 날.
너의 머릿속 모든 것이 사라져도 나만은 잊지 못하는 날.
그 날, 너는 ‘코즈메 켄마’가 박혀있는 ‘쿠로오 테츠로’로 태어나는 거야.
어서 그런 네가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미리 Happy birthday, 쿠로.
E.
추적추적 소리가 아늑히 들렸다. 빗방울들이 바닥에 착지하면 마치 춤을 추듯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바닥에 퍼졌다.
“많이도 내리네.” 네코마의 리베로, 야쿠가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하늘은 네코마의 편이 아니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오늘 이렇게 무수한 비를 내리게 할 리가 없으니까. 하필이면, 부원 전원이 캠핑을 하러 온 이날에. 그들에게 작은 벌이라도 내리는 듯, 무심하게도 작은 액체들이 신나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먹이 낀 하늘을 부원들은 하염없이 올려다볼 뿐이었다.
“…일단 숙소로 전원 집합. 추후 일정은 안에서 다시 짜기로 하자.”
“웃스….”
주장-쿠로오 테츠로의 말에 부원들은 모두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들의 축 처진 어깨를 보자 켄마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마음에 동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합숙은 한 달 전부터 계획했던지라 부원들이 크게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또다시 공허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늘처럼 즐거워야 할 날에 이렇게 비를 내리게 하다니. 눈부신 햇볕을 내리쬐어줘도 모자랄망정. 하지만 그 햇빛은 이미 비의 추위에 얼어붙어 죽어버렸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더 거세져 세게 퍼부었다.
“켄마, 이만 들어가자. 더 있다간 감기 걸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켄마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
쿠로오의 넓고 커다란 손이 켄마의 어깨를 지탱해주었다. 닿은 손을 통해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표정은 무뚝뚝해도 그의 따뜻함만은 항상 진심이었다. 어느새 켄마는 또 그에게 위로를 받고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베풀어주는 그의 배려가 당연하다는 듯이.
요즘 들어 유독 쿠로오의 스킨십이 더 진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평범한 소꿉친구가 으레 그렇듯이 함께 어깨동무를 하는 정도로 끝났지만 최근 들어서는 아까처럼 다정히 어깨를 잡는다거나 볼을 장난스럽게 꼬집는 등, 마치 연인들이나 할 접촉들이 자주 해댔다.
손을 잡는 것도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쿠로오가 한 번 자신의 손을 잡으면 절대 놓으려 않았다. 켄마가 그 손을 뿌리치려 하면 어떻게든 켄마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깍지까지 꼈다. 켄마는 그런 그의 행동이 싫지만은 않았지만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 * *
“선배, 쿠로오 선배랑 사귀세요?”
저녁준비를 하던 중, 큰 키를 자랑하는 1학년 후배 하이바 리에프가 다가와 물었다.
물론 그의 질문은 절대 악의에서 나온 게 아닐 것이다. 순전히 호기심, 그뿐. 하지만 켄마는 순간 말이 막히고 말았다. 이 질문의 정답은 뭐지? 사귄다고 말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게 말했다가 쿠로오가 싫어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애초에 사귀는 게 맞을까? 왜 나는 이런 고민을 하는 걸까.
“그런 거, 아니야.”
“엑? 그래요? 전 선배들이 사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라니까.”
더 강하게 부정했다. 작지만 확실한 어조로.
자신과 이상한 소문이라도 난다면 다시는 쿠로오가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을 것이다. 어떤 걸 다 괜찮아도 그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버려도 쿠로오만은 안 됐다. 그만은 언제나 자신 곁에 있어 주어야 한다. 그를 잃은 자신은-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가 자신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당연했기 때문에.
“리에프! 너 또 농땡이 필래? 빨리 가서 야채 씻어오라고 했잖아!”
“아, 쿠로오 선배! 그게 말이죠, 선배 혹시 선배랑….”
“야채, 내가 씻고 올게.”
켄마는 리에프가 하던 말을 끊으며 접시에 놓인 야채들을 들고 먼저 그 자리를 떠났다.
리에프의 질문을 들으면 쿠로오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분명 질색할 게 뻔했다.
물론 쿠로오가 자신에게 했던 스킨십은 누가 봐도 명백한 애정 표정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런 자신의 생각이 만약 틀렸던 거라면? 그저 켄마의 머릿속에만 있는, 이른바 ‘착각’이 아닐까? 만약 착각이라면 쿠로오는 리에프의 질문을 듣고 무슨 반응을 보일까. 그가 짓는 경멸의 표정을 절대 볼 수 없었다.
켄마가 떠난 자리에서 쿠로오는 켄마의 쓸쓸한 등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에게 빨리 와달라고 외치는 듯한 저 모습에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뒤쫓아 갈 뻔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억누르고 쿠로오는 리에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 켄마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저 별말 안 했어요!”
리에프는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쿠로오에게 변명했다. 리에프가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저렇게 켄마의 신경을 건드릴만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리에프가 그런 말을 했다 해도 켄마가 먼저 귀를 막았을 텐데.
미심쩍은 눈으로 쿠로오는 발길을 옮겼다.
* * *
도망쳤다.
켄마는 야채 바구니를 들고 그대로 숙소 뒤편으로 나와 난간에 꿇어앉아 고개를 숙였다.
왜 이렇게 어리광만 부리는 걸까? 이러면 쿠로오와의 거리만 멀어져갈 뿐이란 걸 알면서도. 머리로는 자각하고 있지만, 몸은 왜 뜻대로 반응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분명 아까 켄마가 자리를 떠난 후 리에프는 쿠로오에게 쓸데없는 말을 했을 것이다. 자신이, 쿠로오와 사귀고 있냐는 말을.
사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쿠로오가 그런 말을 들어버린다면 그 이후로 그는 더 이상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주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들어가지 않으면….
“거기서 뭐 해? 혼자 쭈그려 앉아서….”
위쪽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검은 고양이는 말을 마치고 켄마 옆에 풀썩 앉았다.
가깝다. 그와의 거리가 너무나도 가깝다. 어쩔 줄 모르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바쁜 켄마와 달리 쿠로오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밤에, 잠깐 시간 돼?”
“…왜?”
“시간 돼? 되면 11시 50분까지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나와. 안 나오면 방까지 찾아갈 거니까 꼭 나와야 한다.”
그저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쿠로오는 다시 일어나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켄마만을 홀로 남긴 채로.
11시 50분. 대체 뭘 하려 그러는 거지? 영문을 모른 채 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선배…, 정말 죄송해요. 아까 저 때문에 화나서 나가신 거죠?”
울먹거리는 거구가 켄마에게 다가왔다. 설마 아까 나간 이유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어쩜 이리 순수할까. 켄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리에프를 다독였다.
“아니야. 그런 거.”
“정말요? 하지만 아까 제가 말하니까 갑자기 나가셔서…. 그리고, 아직도 화난 것 같은 표정이신데….”
“…너 때문에 화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리에프의 표정이 밝아졌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참 단순한 후배다. 리에프를 겨우 안심시키고 방으로 돌아가려 할 때….
“아 참, 선배! 근데 정말로 쿠로오 선배랑 무슨 일 있으셨던 거예요?”
“…그건 왜 묻는 거야?”
또다시 아까의 질문을 입에 담은 리에프.
아무 일 없었다. 아무 일 있었다면 다 켄마 자신이 괜히 착각한 것뿐.
그것 말곤 없었다.
그런데 왜 자꾸 리에프는 자신과 쿠로오의 관계를 궁금해하는 거지?
“별 건 아니고, 아까 쿠로오 선배가 되게 안절부절못하시던데 혹시 선배랑 싸웠나 해서요. 켄마 선배, 쿠로오 선배랑 제일 친하잖아요.”
그 쿠로오가, 안절부절못했다고?
상상이 가지 않는다. 여유롭다면 도쿄에서 제일 여유로울 그게 안절부절못했다니. 분명 리에프가 잘못 본 걸 테다. 그렇게 생각하며 켄마는 침실로 돌아갔다.
* * *
현재 시각은 11시 50분. 이제 곧 쿠로오를 만나러 나가야 한다. 약속시간이 되어서야 나가는 이유는 딱히 바쁜 일이 있어서도, 나가기 싫어서도 아니다. 켄마가 아는 쿠로오 테츠로는 약속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성격이다. 지금 시간에 나가도 늦기는커녕, 쿠로오도 막 도착해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까 자신이 청승을 떨었던 숙소 뒤편으로 향했다.
놀랐다.
자신보다 그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니. 쿠로오는 저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얇은 모랫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켄마의 발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50분에 딱 오라고 했잖아!”
많이 기다린 듯 쿠로오는 켄마가 오자마자 그에게 버럭 화를 냈다. 평소처럼 능글맞은 쿠로오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켄마는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웬일로, 일찍 나왔어?”
“…그래도 정각 전에는 왔네.”
“뭐?”
“됐고, 일단 여기 앉아봐.”
쿠로오는 저녁때 켄마가 꿇어앉아 있었던 자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쿠로오의 부름에 따라 켄마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제 서야 켄마는 쿠로오 주머니가 두툼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요즘 너 이상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들켰다. 자신의 마음을 쿠로오에게 들켜버렸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켄마는 그저 말없이 쿠로오를 바라봤다.
“내가 무슨 말만 하려 하면 피하지, 눈만 마주치면 피하려고만 하고. 아까 리에프 녀석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데 그런 거야?”
“그것 때문에 부른 거야?”
“그거 물어보려고 부른 것도 있긴 하지만. 내가 왜 널 불러냈는지 정말 모르는 거야?”
알 리가 있나. 다른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 쿠로오가 자신에게 충격적인 말을 하지 않을까, 그것만 노심초사하면서 나왔다.
그 말 한마디만 하지 말기를 절실히 바라면서….
너 나 좋아하냐?
그 말만은 제발.
“모르면 됐고. 지금 몇 시지?”
쿠로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액정에는 11시 59분이라고 떠 있었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
쿠로오는 호들갑을 떨면서 또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 물건은 다름 아닌….
예쁘게 포장된 작은 선물 꾸러미였다.
그 순간 알람이 울렸다.
12시를 알립니다.
“…생일 축하한다. 켄마.”
빨간 단색 포장지에 켄마의 머리처럼 노란 끈으로 예쁘게 묶인 선물 한 상자. 쿠로오는 조심스레 선물을 꺼내 켄마의 손에 쥐여주었다.
“오늘 네 생일이잖아. 너 설마 그것도 모르고 있었냐? 다른 사람 다 몰라도 넌 알고 있었어야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쿠로오에게 정신이 팔려 내일, 아니 오늘이 자신의 생일인 것까지 잊고 있었다. 쿠로오가 보는 앞에서 켄마는 선물 포장을 뜯었다.
그 안에는 샴 고양이의 인형이 달린 열쇠고리가 들어 있었다.
“게임기 케이스에 걸고 다녀. 귀엽지 않냐? 이거 내가 직접 고른 거다.”
“…고마워.”
진심으로 나온 말. 꾸밈도 과장도 없는 가슴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작지만 켄마에게 있어 아주 큰 선물이었다. 손에 쥐고 있기만 해도 그를 머릿속에 그려준다. 켄마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지금의 순간을 기억하고자.
“그리고, 할 말이 있는데….”
“또 뭐?”
쿠로오는 주춤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켄마는 손에 있는 고양이 인형만을 보고 있었다.
“예전부터 말하려 했던 건데. 지금 말하게 됐네.”
“뭔데.”
또 다시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일까? 켄마는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직도 켄마는 고양이 인형을 만지고 있었다.
“좋아해.”
심장이 내려앉았다. 혹여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 때,
“좋아한다고.”
또 그가 입을 열었다.
“누구를.”
“널.”
주변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 느낌. 예전에도 느낀 적이 있다. 쿠로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눈치챘을 때, 그때도 이렇게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온몸이 굳고 머리가 멍해졌었다.
자신이 지금 뭘 들은 건지 켄마는 다시 생각했다.
‘지금 쿠로오가 내게… 고백을 한 걸까?’
그렇게 기다려왔던 한 마디인데. 지금 상황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닌데. 켄마의 몸이 고장이라도 난 듯, 그때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역시 같은 남자가 고백하는 건 징그럽지? 알고 있어. 그래도 이루지 못할 거, 한 번이라도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라도 하긴 했는데, 타이밍이 안 좋았던 것 같다. 생일날 고백하면 되게 낭만적일 줄 알았거든. 낭만은 개뿔. 오글거리기만 하네.”
쿠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켄마에게서 등을 돌렸다. 넓은 어깨를 감싸는 붉은 저지. 그런 그의 붉은 뒷모습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슬퍼 보이는 걸까.
“선물 잘 써라. 추우니까 금방 들어오고.”
당장이라도 떠날 것 같은 그 등이, 마치 켄마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켄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 챘을 땐, 이미 켄마는 그의 등에 안겨 있었다. 지금 잡지 않으면 그를 영영 보지 못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이별. 켄마가 그렇게 질색하던 결말이 아닌가.
“왜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
“보통은 그렇잖아.”
“보통 말고.”
쿠로오의 숨이 막히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에게 안긴 켄마의 팔에 힘이 풀리고 그는 뒤를 돌아 고개를 숙인 켄마를 바라봤다.
“나한테 고백했으면, 보통이 아니라 날 생각해야지.”
뜻밖의 대답에 쿠로오의 째진 눈이 커졌다. 지금의 대답을, 쿠로오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금 나 기쁜 건가?”
“왜 나한테 묻는 건데.”
“미안, 나도 내 감정을 잘, 모르겠어.”
쿠로오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하염없이 하늘만 올려다보는 그의 모습에 켄마는 새삼 턱선이 날카롭단 생각을 했다. 쑥스러워서 그런지 쿠로오는 좀처럼 켄마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이해가 안 돼.”
“뭐가?”
“네가 날 좋아하다니. 지금까지 그런 거,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거든.”
켄마는 쿠로오를 좋아한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그만을 보면 심장이 뛰었고, 항상 기쁜 일이 있으면 그에게, 슬픈 일이 있어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애먹었으니까.
하지만 그 쿠로오도 켄마를 좋아한다는, 그런 해피엔딩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쿠로오가 평소에 켄마에게 했던 행동들은 그저 ‘소꿉친구,’ 그 자체였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확신을 못 줬나? 나름 티 많이 냈다고 생각했는데….”
둘 사이에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쿠로오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그럼 지금부터 티 많이 내도 되나?”
“티라니 어떤…!”
켄마는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입안으로 달콤함이 들어왔다.
그 달콤함이 그의 혀라는 걸 안 건 입맞춤을 한 지 몇 초 후.
지금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서로를 느꼈다. 다시는 없을 그 시간을. 천천히, 보통 평범한 연인들이 그러하듯. 이제부터 그들은 자신에게 솔직해진 것이다.
시간이 조금 흘러 입을 뗐다. 그리고 아까와는 달리, 켄마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쯤이면 티 나지?”
어쩔 수 없는 그의 투정을, 켄마는 말없이 받아들였다.
“…응.”